내가 미국 워싱턴에 계신 신동수 목사님(워싱턴크리스찬교회) 집에 머물고 있는데, 끼니 때가 되면 신 목사님을 부르는 전화가 있었다. 손님이 있어서…, 한국에서 목사님이 오셔서…, 한 분인데…, 등의 내용으로 상대방에게 답변하는 신 목사님께 그 사람 누구냐고 이틀 후에는 내가 물었다. “목사님이신데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고 했다. 혹시 만나거든 신 목사님께 힘을 보태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해 달라고 한다.
나는 전도자이면서도 준비된 일정이 아니면 여행중에 일정을 잘 바꾸지 않는다. 그런데 `만나거든…'이라고 말하는 신 목사님의 말 사이에서 풍기는 여운을 붙잡았다. 내 마음의 환경을 배려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분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물었다. 양로원 비슷한 일을 하는 목사님이라고 하여 일단 같이 가자고 했다.
내가 서두르자 신 목사님은 채식(Vegetable diet)이라고 했다. 그건 내가 참으로 기다리던 식탁이라며 환호하자, 우리는 더 기다릴 것도 없이 사무엘 김 목사의 집으로 갔다. 우선 간단한 인사를 하고 준비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점심식사인데 저녁식탁도 menu는 같다는 것. 샌드위치와 과일, 그리고 무우채지 같은데 매우 싱거웠다. 건강식이다. 한국에서도 유행하는 Wellbing식탁이다. 채식류에 짜고 맵지 않은 식탁인 셈이다. 나는 속으로 `뭘 대단치도 않구먼…'하면서도 즐겁게 먹었다.
Samuel Kim이라고 하셨죠. 그러자 김 목사님은 명함을 내밀었다. 그가 내걸어놓은 간판의 `사랑의 집'이다. 올해로 60살이다. 그는 나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사이에도 함께 생활하는 노인들이 기웃거리면 시늉을 하고 식탁을 돌보는 이들과도 잠깐씩 대화를 한다. 바쁜 생활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내게 호의를 가진듯, 내 얼굴과 마주치는 횟수가 많아진다. 1977년 7월 16일 미국에 왔습니다. 그때는 사업을 목표로 미국행을 결행했던 사람이고 신자는 아니었다.
그는 꿈에 하나님의 인도를 받은 특별한 신자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그러면서 신자가 됨과 동시, 자기의 마음 속에 불쌍한 사람을 지나처버릴 수 없는 은사를 주셨다고 말한다. 어려운 사람 소식을 들었다.
`허닝스'라 이름하는 할머니다. 1954년에 미국에 이민 온 할머니는 워싱턴 DC교민 사회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김 목사가 워싱턴 DC에 정착하면서 곧바로 소문을 들었던 멋쟁이 할머니, 메리린 먼로 같은 체형의 빨간 원피스를 입은 할머니, 늘 빨강색 스포츠카를 몰던 할머니였다. 미세스 허닝스에 대한 소식을 김 목사로부터 직접 들었보자.
워싱턴 DC의 멋쟁이 할머니가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죽어가는 그의 모습이 너무 처참하더라고 소문이 났어요. 어려움에 처한 노인의 일이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나였기에 곧바로 달려갔어요. 허닝스 할머니를 잘 아는데, 그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방바닥에 누워있는 늙은이는 아이들이 곧잘 표현하는 마귀할멈이랄까? 툭 튀어나온 광대뼈, 그리고 눈자위는 푸르덩하고 눈은 감았는지 떴는지를 모를 만큼이고 머리는 엉클어져 있었지요. 온 방안에 가득한 찌린내, 썩은 냄새와 함께 똥냄새, 정신을 차려보니 실제로 똥덩이들이 여기저기에 묻어 있어요.
순간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서 송장처럼 늘어져 있는 할머니를 끌어안았습니다. 이게 웬일입니까? 언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내가 그때 그 할머니를 붙들고 얼굴을 마주 비비면서 인간이 너무 불쌍하다, 죽어가는 이가 불쌍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내던져버린 이들이 불쌍하고, 이런 환경에서 아무런 힘이 못되는 나 자신이 불쌍했습니다. 할머니를 붙들고 서럽게 울었습니다. 울다가 지쳐서 눈을 뜨니 나와 할머니를 지켜본 이들의 말로 3시간이 넘었다고 말해주더군요. 정신을 가다듬어 허닝스 할머니를 바라보니 할머니가 자기 딴에는 힘차게 말한다는 듯이 외쳤습니다. `나 살고 싶다…'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죠.
할머니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래요 살아야지요. 살아야 하고 말고요. 내가 살려드릴께…, 라고 하면서 저의 집으로 할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사무엘 김. 그의 말을 들으면서 그의 진실을 확인했다. 허닝스 할머니는 김 목사의 기도와 `식이요법' 등을 통하여 다시 살아나서 김 목사와 함께 간증자가 되어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90살이 되던 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2년 전이라고 했다.
김 목사가 하는 말 모두를 믿을 수 있는 증인들이 거실(식당) 옆방에 여럿이 있다. 나와 함께 대화의 깊이로 빠져드는 김 목사님 곁에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와서 고개를 꾸벅한다. 어린아이 같은 눈을 가졌다.
김 목사가 할머니를 붙잡고, 할머니 살고 싶죠? 느닷없이 하는 말에 할머니는 `암요'라고 답했다. 93세의 할머니이다. 5년 전에 갈 곳이 없던 할머니였다. 가정이나 정부기관에서도, 병원마저도 두 손을 들어버린 할머니를 김 목사가 그의 집으로 모셔왔다. 그리고 6개월 만에 할머니를 정상으로 살려냈다. 또 한 할머니가 방문을 살짝 열고 얼굴을 내민다. 이 권사님 하고 부르니 문 살짝 열던 할머니가 나섰다. 이 할머니는 89세다. 역시 3년 전 미국 사회가 버린 늙은이였다. 김 목사가 다 시들어버린 화초를 가꾸듯이 할머니를 살려냈다.
저는 허닝스 할머니를 내 집에 모시고 3개월 기도와 정성으로 간호했더니 다시 옛모습을 되찾아 빨간 캐딜락을 몰고 다니며 20여년 동안 전도와 간증으로 사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 후에 예수께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5:14)하면서 예수께서 자기가 관리하는 이들을 치료하셨음을 증거하고 있다.
김 목사는 그가 마련한 식단을 통해서 건강식과 무공해식, 특히 짜고 매운 것 끓여서 먹는 재래의 한국식 음식에 대한 염려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이다. 나와 함께 앉아서 그의 이론을 (신념을)전개하는 주요 대목마다에서 성경을 인용하는데 2~30회는 더 증거하고 있다. 마치 성경 전체를 암송할 수 있는 사람처럼.
그렇다면, 그는 보호하고 있는 15명과 더불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사람(생명) 사랑하기를 기뻐하시는 이의 뜻을 지켜내기 위하여 온 몸을 내던진 사람이다. 그의 일과를 살펴보자. 바쁜 일정 가운데 생명사랑의 헌신을 위한 그의 모습을 다시 또 살펴보자.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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