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탐구(탐색)_51 3장 1~15절

요한계시록은 요단강 건너는 절차과정이고, 요한복음은 그 강을 건너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고,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하늘)으로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절차 과정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심판날 이후의 책이라 하여 십사만사천명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박태선, 이만희 등이 만들어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

예수는
니고데모의 위선을 지적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가
 하늘나라를 말할 수는 없다.”

 

예수는 그의 몸을 저희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요2:24) 하신 말씀을 쉽게 들어 넘겨서는 안 된다. 모든 성경이 그러하거니와 요한복음은 특히, 자기 언어를 별도로 사용하고 있다. 어찌 보면 장난스럽게, 더 나아가서 심술까지도 느껴 볼 수 있다. 요한복음 저자가 이토록 집요할 만큼 하나님께 저항(?)아닌 저항을 하는 듯이 느낄 수 있는 것은 그가 언어에 대한 신뢰를 크게 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말로써 말을 만드는 행위를 그는 매우 싫어한다.

그걸 어찌 아느냐고 묻는 이가 있다면 나는 이렇게 답변한다. 요한복음 저자가 쓴 복음서가 “헬라어 번역본” 뿐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사상의 핵심은 “히브리 사상(철학)”으로 형성되어 있다. 아마, 요한복음 저자가 쓴 복음서가 “헬라어 본” 말고, 히브리어와 아람어 혼용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헬레니즘이 득세할 때인지라 헬라파, 또는 비잔틴 파 교권주의자들이 폐기하였을 수 있다.

헬라어가 과학적이기는 해도 언어 철학은 과학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필자는 60년대 이순한 목사님으로부터 헬라어의 히브리어(초급) 공부를 했고, 2천년대 초 김선기 목사의 “페트라”에서 또 공부했다.

한번은 설 연휴 때 대전에서 30여명의 수강생들과 한 주간 합숙을 했는데, 특강 마치는 날 강평회를 할 때, 김 목사님이 소감을 물었을 때 “히브리어마저도 하나님 말씀을 다 표현하기에는 아직도 부족하구나” 할 때까지 더 공부하겠다고 답변을 했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내게 김 목사님이 물었다. 이에 대해 필자는 “헬라어에 비해 히브리어 문법의 불완전성을 보면 알 수 있겠다”고 말했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지만 인간에게 나타난 예수는 인간이 받아들일 범위 안에서라는 말이 있다. 헬라어, 한국어, 라틴어, 영어, 히브리어 등 그 어떤 언어도 인간세계의 “사유체계(철학)” 범주 안에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또 요한의 이름으로 된 복음들이 있다. 요한 1,2,3서는 물론 요한계시록까지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을 마치 미대(천국)에 대한 예언서로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은데 그건 오해하는 것이다.

계시록은 바벨론 포로기와 중간사를 거쳐 온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이다. 이 계시록은 영적(천국) 세계용 별도 복음서로만 아는 이들은 공부 더 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그 다음에 요한복음을 읽어서 합격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은 요단강 건너는 절차과정이고, 요한복음은 그 강을 건너서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고, 그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하늘)으로 만드는 그리스도인의 절차 과정이다.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심판날 이후의 책이라 하여 십사만사천명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를 박태선, 이만희 등이 만들어서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서투른 솜씨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공부 좀 더 해야 한다. 이 지면 앞부분에서 요한복음은 21장부터 1장으로 거꾸로 읽어도 뜻이 같고, 심지어 주인공을 바꿔도 성립이 된다 하였는데도 어느 누구 한 사람 내게 반문하지 않는데, 참 안타깝다.

어쩌면 무시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대목은 요한복음, 요한의 모든 글 해독의 중요한 열쇠(master key)다. 요한복음 외 요한의 이름으로 전 복음서가 요한복음의 동일인의 글일 경우라면 말이다.

요한복음은 2장에서 포도주 향연을 잔치로만 해석을 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준엄한 계시가 있다. 그리스도 교회는 포도주(즙)로 표기되는 이 액체를 메시아 예수의 피로 해석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2장과 19장이 동일한 의미와 계시성이 번뜩이는 피의 희생이요 대속죄 행위임을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필자는 요한복음은 거꾸로 읽어도 그 뜻을 이해하는 데 혼선이나 불편이 없다고 확신한다.

오늘 시작하는 3장에서 예수는 니고데모의 방문을 받는다. 저녁 어두운 시간이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의 의장으로 전해지고 있다. 예루살렘 종교의 어른이다. 그런 인물이 이름 없는 시골 청년을 찾아왔으니 예사롭지가 않다. 주변이 긴장하고, 사람들의 시선이 니고데모에게로 쏠렸다. 니고데모가 입을 열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의 말을 들으신 예수는 빙긋이 웃으셨을까. 니고데모의 말은 절반은 옳으나 나머지 절반은 틀렸다. 땅에 속한 자, 거듭남의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자가 하늘, 하나님, 뜻을 말하는 것은 위선이고 거짓이다. 예수는 니고데모의 위선을 지적했다.

“거듭나지 아니한 자가 하늘나라를 말할 수는 없다.”

니고데모는 찔끔 정도가 아니라 예수의 서릿발 돋는 듯 차갑고 메몰 찬 한 마디가 가슴을 두들기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예수의 인정사정없는 말에 화가 났다. 그는 빈정거림을 뒤섞은 한마디를 내뱉는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나요?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나이까?”

다시 태어남의 절차를 어미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나? 이 늙은이가 어미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오라는 것인가? 이 대목은 니고데모의 빈정거림이다.

진리를 사모하는 자의 태도가 아니다. 밤늦게 예수를 찾아왔다더니 역시 니고데모는 정직하지가 않다. 왜, 밝은 대낮에 당당하게 찾아오지 않고, 남들의 눈을 피해서 오는 것이가. 진지하지가 않다. 역시 예수와 함께 하늘나라를 말하기에는 그 수준이 모자란다. 외형의 신분이 아니라 삶의 정직한 자세가 먼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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