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사야 40:1∼5, 로마서 8:18∼25, 요한복음 6:51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 땅과 이 민족, 오늘날의 세계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부활의 사건을 통하여 피조세계에 베풀어주시는 생명의 힘과 평화의 나눔이 지구촌의 참되고 유일한 소망임을 믿습니다.

# 물질만능주의가 지고한 가치 무너뜨려

우리는 신음하는 세계 한 가운데에서 다시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작년 12월에 서해안에서 기름 유출로 발생한 재난이 피조 세계의 탄식이라는 주제를 우리 삶의 한가운데 분명하게 각인시켰습니다만, 이 사건은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총체적인 탄식의 단면일 뿐입니다. 지난 2월에는 숭례문이 화재로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두 사건에는 사회적인 문제보다 더 중대한 측면이 있는데, 사회의 시스템을 만들고 관리하는 주체인 사람의 문제입니다. 사회의 병든 시스템 그 뒤편에 병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 웅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와 오늘날 세계의 단면인 두 사건에서 우리는 가치문제에 대해 무감각한 우리 모습을 발견합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은총입니다. 자연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인데 우리는 이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반복될 수 없고 생산될 수 없는 것, 사람이 그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갖는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영혼과 정신이 본디의 아름다움을 향하여 높아지면서 만들어진 것이 문화재입니다. 그 안에는 문화재가 만들어진 시대의 인간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개인적이고 단견적인 이익을 넘어서서 영원을 향한 영혼의 갈망이 구형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문화재가 담고 있는 시대의 정신은 다시 반복될 수 없습니다. 문화재의 가치는 경제적 계산으로는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처해있는 가치관의 혼란상황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돈이면 다 된다고 여기는 배금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일이나 삶의 과정 자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망각하게 만드는 효율과 능률 지상주의가 만연돼 있습니다.

# 영생하게 하는 양식 갈구해야

무엇이 참으로 가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시간과 몸과 소유를 내어주며 살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인 사람의 본성이 무엇이며, 참된 행복과 삶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묻는 것은 드문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삶과 죽음의 의미,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 희생과 섬김과 겸손, 정신과 영혼의 가치, 창조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등에 대해서는 무지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1∼18).
이런 상황에서 세상 한가운데 존재하는 교회도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의 탄식에서 우리는 오늘날의 세계를 끌어안고 아파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음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께서 창조 세계를 끌어안고 신음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신음과 탄식 앞에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 요한복음 6장은 이지러진 가치관을 갖고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열정적으로 자기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27).
지금 예수님께서 책망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따르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지만 영생하게 하는 양식에는 관심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그리스도인이 적지 않습니다. 물질 만능주의와 배금주의에 물들어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성경적 가치관을 바르게 깨닫고 그에 따라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에 진지하게 관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 부활의 삶, 구체적 자기희생 실현

사람들은 여전히 물질적인 것에 관심을 보이면서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요 6:30∼31).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요 6:48∼51).
예수님은 타자를 위한 존재이셨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희생하여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떡으로 비유하면서 살과 피를 강조하십니다. 떡이 자신의 살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표현하며 ‘나를 먹으라’고까지 말씀합니다. 이런 표현 방식을 통해서 예수님은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것이 결코 추상적일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먹히도록 자기를 내어주는 것은 패배와 실패, 상실과 손실을 뜻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가진 이런 두려움을 잘 아십니다. 인간적인 삶의 구조에서는 패배요 상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부활의 길과 그 영적 구조에서는 상생과 영생으로 이어집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자신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남을 위한 자기 헌신이며 자기 몸을 드린 구체적인 희생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먼저 자신을 돌아보며 우리 신앙의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야 합니다.

# 모든 피조물 하나님 영광 참여하는 부활

오늘날 우리네 삶의 현장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탄식에 오히려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우리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의 신음과 탄식은 그분이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증거입니다. 피조물의 탄식과 우리의 탄식에도 소망의 씨앗이 있습니다. 탄식은 적어도 현재의 상황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에서 탄식이 나옵니다. 탄식은 회개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탄식하는 사람은 아직은 길을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이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이런 탄식의 자리에 거룩한 영이 오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감싸 안으시며 같이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은 방법을 아십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방식을 잘 아십니다. 나를 내어주어 너와 내가 같이 살아 우리 모두가 더불어 사는 상생과 대동의 길을 잘 아십니다.
거룩한 말씀 이사야서는 그 길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3∼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미래의 정점입니다. 그 영광은 부활의 영광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먼저 그 영광을 누리며, 이로써 다른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이 이 영광에 참여합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가 바라보아야 할 희망입니다.
이런 근거에 서서 우리는 이 민족과 오늘의 세계에 위로와 희망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피조 세계의 비참함을 보고 신음하며 탄식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세상에 위로의 메시지를 주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사 40:1∼2).

# 말씀으로 외치고 진실하게 살자

선지자는 “마음에 닿도록” 외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외치는 것이 이 민족의 마음에 닿게 될까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선포하는 메시지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까요? 먼저는 우리가 전하고 외치는 것이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우리가 먼저 외치는 내용에 따라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두 번째 것이 더 절실합니다. 우리는 이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이 민족의 마음에 닿아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할 때 한국 교회는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 마음을 울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염된 서해안을 살리는 것은 이런 고백과 결단의 구체적인 증표입니다. 내가 서있는 직업과 삶의 현장에서 작은 것부터 진실하게 그리스도의 방식을 따르는 것이 우리의 신실함을 보여줄 것입니다. ‘늘 새로워지는 교회’(Ecclesia semper reformanda)라는 이천년 교회 역사의 중심 명제처럼 한국 교회가 회개와 갱신과 일치에 힘쓸 때 다른 사람들이 교회가 세상의 등불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생명의 나눔이 우리 미래의 희망입니다. 한국 교회와 사회 더 나아가서 오늘날 세계에 이 희망이 가득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2008한국교회부활절연합예배 공동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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