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십자가의 전사 김진구 목사(신동감리교회)

사람들이 열정적으로 누군가를 혹은 교회를 또 혹은 교회와 관련된 어떤 일들을 사랑하다가 쉽게 좌절하고 낙심하며 실족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첫 번째 되는 계명을 잘 모른 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서기관 중 한 명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신명기 6장에서 언급된 “쉐마 이스라엘!”을 인용하며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막 12:30)고 하였습니다. ”쉐마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모르는 자들은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첫째 되는 계명을 언급하신 이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는 둘째 계명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도 보면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주님은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 되었으며 너는 또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눅 10:26)라고 했습니다.

그때 율법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말했고, 주님은 대답하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눅 10:18)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사랑을 통하여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지혜와 명철을 공급 받으며 온전한 이웃사랑과 형제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을 확증하는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혹은 형제)을 미워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요한 사도는 “거짓말 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요일 4:20).

우리들은 형제사랑이나 이웃 사랑을 통하여 하나님 사랑을 확증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이웃이나 형제들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우선 복음에 눈이 뜨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참사랑.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완전한 복음이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으며 그 예수님 안에서 그 예수님과 더불어 이웃사랑과 형제 사랑도 실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주에서 목회할 때 사랑하는 성도들과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수 년 간에 걸쳐 건축할 대지를 확보하고 건축자금을 모으는 과정 속에서 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며 고군분투했습니다. 낡고 허술한 조립식 건물인 구예배당을 허물고 조그만 비닐하우스에서 2년간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의 은혜로 설계도가 나오고 2005년 3월에 예배당 건물의 벽돌조족이 9m까지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왔는데 햇빛이 아름답고 예쁜 붉은 벽돌 조족 위로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아름답게 반짝이던지 저는 “아!”하고 경탄하며 그 건물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음성이 나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려왔습니다.

“김 목사, 너무 기뻐하지 마!”(주님이 저를 김 목사라고 불러 준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저는 그때 비로소 목사로 인정받은 것과도 같다는 흐뭇한 느낌을 지금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님의 그 음성을 듣고 깜짝 놀라 주님에게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주님, 너무 기뻐하지 말라니요? 주님은 우리들이 이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생하며 수고 했는지를 아시잖아요?”

“알지. 그러나 한 번 생각해 보거라. 네가 내 앞에 왔을 때 이 건물이 너와 나 사이에 끼어 들 수 있겠니?”라고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 왔습니다.

나는 내 속의 은밀한 탐심이 들킨 것 같아서 잠시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또 다시 주님께 질문했습니다. “주님~ 저는 이 건물 때문에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아시잖아요. 이것은 우리들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다시 또 들려왔습니다.

“김 목사야~ 그렇다면 네가 생각하는 그 부흥이 너와 내 사이에 끼어 들 수 있을까?”

“이 마을 주민들이 다 교회에 나오고, 네가 생각하는 그 부흥이 이루어졌을 때 그 부흥의 현장이 너와 내 사이에 끼어들 수 있을까?”

“그리고….”
계속 되는 주님의 말씀에 내 속에 있는 것들이 하나 둘 씩 다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내 속은 여전히 주님이 아닌 다른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다시 또 주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무엇이 끼어 들 수 있을까요?”

그때, 주님은 아주 짤막하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은 밀도가 있단다.”

“그렇다면 그 사랑의 밀도는 어떻게 증가하는 것인가요?” 나는 다시 또 질문했습니다.

주님이 대답합니다.

“앞으로 내가 너를 향해 베푸는 모든 은혜와 사랑도 날마다 의심하지 말고 수용하여라.”

“그리고 너도 흔들림 없이 십자가를 붙들고 나와 동행하며 내 계명을 지켜 나의 사랑 안에 날마다 거하거라.”

주님은 요한복음 15장 10절 말씀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한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나는 오늘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합니다. 예전에는 나의 사랑의 대상이 “민족”, “인류”, “자연” 등등. 아주 허황되고 막연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에게 또 이런 말씀을 기억나게 하셨습니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게 마음을 두라.”(잠 27:23)

주님의 이 말씀은 내가 정말로 사랑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 주었습니다. 민족이니 인류니 자연이니 하는 것은 “책임”의 대상이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해주었습니다. 내가 정말로 사랑해야 할 대상은 나를 위해 자기 몸을 버리신 주님과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시고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는 그 모든 영혼들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도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하기 위하여 주님이 나에게 맡긴 양떼는 어디에 있으며 소떼는 무엇을 하고 있는 지 기도하며 깊이 헤아립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보다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위하여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 안에서 깊이 머무르며 주님의 말씀들을 지켜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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