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비아 아들들은 성경을 눈여겨 보았다. 저들은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 매우 주요한 인물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저들은 아브라함이 두 아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긴장감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아라비아 남부에 살만한 정착지가 저들에게는 있었다. 또한 소망스런 징조도 있었다. 성지 메카의 10대 부족중 하나인 압드 알 무타리브(Abdal Mouttalib)는 메카의 카바 신전을 찾았다. 검은 대석(臺石)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며 인류가 지상에 최초로 구축한 성역이라 한다. 카바는 맨 먼지 아담이 축조한 것을 아브라함(Abraham)이 재건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이며 전 아랍인의 조상인 이스마엘(Ismael)이 다시 일으켰다. 비록 신전 주위에 유사한 잡신들이 기웃거리고 있지만 주신(主神)의 위상이 워낙 뚜렷하기에 어느 누구도 카바 주변의 잡신들로 말미암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카바 신전에 당도한 무타리브는 엎드렸다. 아들을 달리고 기도했다. 아들 열명을 주시면 그 가운데 한명은 희생제로 바치겠다고 했다. 무타리브 일족은 아담과 이브를 조상으로 섬기는 종족이었다. 무타리브는 소원했던 아들들을 얻었고. 또 그가 신에게 약속한 아들 하나를 피의 제사로 드리려 햇다. 그가 곧 후일에 태어날 모하멧의 아비 압달라(Abdallah)였다. 모하멧의 탄생과 그의 종족들의 삶은 아라비아 정보에 익숙치 않은 기독교에게는 놀라운 것들이다. 앞서 말했지만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이브가 살았던 곳이라 하고, 오늘의 이슬람 종교의 최고 성지인 메카의 카바 신전은 아담의 작품이고, 아브라함과 그 아들 이스마엘로 이어지면서 정신적 터전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어느 타인들이 시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물려받은 성경의 구원사에 대한 부분들에 대하여 기독교 밖의 어느 누구의 시비에 대한 가치부여를 기독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묘하게 얽혀진 관계이다. 모하멧의 등장과 그들 이슬람의 성경이해는 또 이렇다. 예수께서 보내실 진리의 보혜사(요 15:26, 16:7)로 이해할 때 `보혜사'의 헬라어 파르클레토스 `παρκλητο<&23993>'를 페르클레토스 `περκλητο<&23993>'로 읽는다. 페리클리토스로 읽으면 이 말은 모하멧 즉 `가장 찬양을 받는 자'를 말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까지 언제나 별도의 여지를 남겼다. 아담과 이브를 추방하여 대적자의 삶의 터를 남겨 두었고 아벨과 가인의 투쟁 때에도 가인의 무대를 남겨 두었고, 이삭과 이스마엘 시대에도 이스마엘의 무대를 남겨 주셨으며, 야곱과 에서의 관계에서도 에서의 길은 있었다. 그뿐인가. 역사를 붙잡으면 얼마든지 또 하나의 세계가 엄존한다. 보혜사를 말하여 모하멧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면, 그들이 더욱 출중했다면 재림 예수가 모하멧이라고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논리의 빈 틈이 된다. 창세의 무대 위에서 목축의 아들들은 강력한 투쟁을 한다. 절대 빈틈을 용납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투쟁할 때 쯤에는 양자의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아비 아브라함에 의해 사막에 버려지지만 하나님은 `하갈아 무슨 일이냐?'(창 21:17) 하셨고 그들 모자의 눈을 밝혀 오아시스를 얻게 하셨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버린 하갈과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천사가 동원되어 생명의 날이 만만치 않을 것을 예고 하였다. 가인, 이스마엘, 에서로 이어지는, 어찌 그뿐이랴. 모세의 시나이 40년 유랑 또한 사막이 무엇이며 사막에서는 무엇을 배우는가를 보여주신다. 사막의 윤리, 사막의 생존법이 있다. 사막은 가옥한 땅이다. 사막으로 쫓겨나면 그들은 모두 유목민이 된다. 사막의 깊은 곳으로 가면 며칠 또는 몇달은 걸어도 지나가는 사람의 그림자도 만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예로부터 사막은 무덤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사막에서 인간의 존엄을 배운다. 사막의 생존법은 맹렬한 투쟁, 육체적 조건까지 갖춘 덕성, 인간관계 또 인간과 신의 관계를 분명히 하는 계율(율법)을 만나게 된다. 모세가 시나이에서 무려 40여년동안 그 백성을 훈련시켜 가나안으로 갔던 것을 우리는 안다. 아라비아의 유목민들과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이 버리고, 유대인이 버리고 기독교가 버린 자들이 아라비아 등지의 사막에서 제2의 인간(종교)의 탄생을 예고하였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어쩌면 열두제자의 무리에서 밀려난 가룟 유다와 그의 지지자들도 아라비아 카바 신전을 중심한 곳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살만한 땅에서 추방 당한 자들이 모여서 제2의 도전, 패자전이라 할까. 승자와 패자의 재대결을 위한 버림 받은 땅일까? 아라비아 전승에 의하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추방 당한 후 아담은 인도로, 이브는 아라비아로 각각 추방 당했다. 아담은 대장장이로 일하면서 하루 하루 살았다. 아담이 사막을 배회하다가 메카로 발길을 옮기는 중 하와(Hawa)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아라비아의 이브를 다시 만났다. 그들이 재회한 곳은 아라파산 근처인데 아라파(ta arafa)는 `그들은 서로 알아보았다'라는 말이다. 그들 아담과 이브가 다시 만나 가인을 낳고 아벨을 낳았다. 가인과 아벨은 인류 최초의 골육간의 살생 기록을 남긴다.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기독교는 피할 수 없는 대결의 날들 속에 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인류는 `미완의 상태'에서 늘 불안하게 살아왔다. 예수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또는 제2의 아담으로 온 뒤에도 인류에게 안녕이 없다. 특히 기독교의 보혜사 성령의 자리를 도둑해간 이슬람, 그리고 그 은총의 자리를 빼았긴 교회와의 투쟁은 각기 무지의 법 때문에 반복된다. 우리는 기독교가 양성론(신·인성)과 단성론(신성)의 싸움터에서 방향을 잃고 삿대질을 할 때 모하멧이 일어났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는 좌절이다. 후하게 말하면 미완, 미완성 종교의 한계라 해야 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종교를 초원하려다가 종교에 사로잡힌 자들의 범주라고 할 수 있다. 유대교와 기독교가 그리고 이슬람이 함께 좌절하는 근본주의의 한계를 보는 셈이다.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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