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경우 기독교는 서양의 선교사들에 의해 들어왔기 때문에 당연히 서양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동방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기독교의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어 올라가면서 이러한 상식의 틀을 깨뜨리는 데에 저자의 역사학자적인 기질이 발휘되고 있다. 저자는 어떤 이유로 이런 논리를 펼칠까. 팔레스타인 지방의 유대교에서 예수의 탄생과 함께 발원한 기독교. 후에 팔레스타인이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로마에 기독교가 수용되었고,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정통' 교단이 생겨나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의 교리 형성에 있어 이들 정통 교단과 맞지 않았던 에집트 콥트교회, 카프카스 아르메니아교회 등 몇몇 교단은 이단으로 정죄돼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 됐다. 이중 네스토리우스교(경교)는 박해를 피해 동방에 자리잡고 무려 1천년 가까이 자신들의 교세를 넓혀갔다.  네스토리우스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는 428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3년만에 이단으로 규정되어 대주교의 자리를 박탈 당하고 아프리카 사막으로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생을 마감한다.  한편 그를 따르던 신자들은 페르시아 지방에서 100년 이상 계속된 박해를 피해 동방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네스토리우스 교를 지속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러나 후에 이슬람 세력의 강성, 국제교역 쇠퇴, 흑사병 등의 이유로 무너졌다. 또 동방의 다른 종교와 관습의 영향을 받아 변질되었고 오늘날에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쇠퇴했다. 이 책은 중세 유럽인들은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당시 유럽인들은 이슬람과의 싸움에서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소문으로만 들어 알고 있던 동방의 기독교 군주인 `요한'이 무슬림들을 물리쳐 주길 고대했다. 또한 암암리에 사제왕 요한이 대군을 이끌고 이슬람을 물리친 후 십자군을 돕기 위해 예루살렘을 진격하여 티그리스 강까지 왔다가 돌아갔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번지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새로운 희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이 기다린 동방 기독교의 군주 `요한'은 실존했던 인물이었을까. 서구인들의 동양에 대한 무지도 상당부분 작용했겠지만 당시 동방에는 기독교가 실제로 넓게 퍼져 있었던 것이 사실임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앞서 설명한 정통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낙인찍혀 쫓겨난 이들이 동방에 자리잡고 교세를 확립시켰던 것이다. 지리적 위치로 봤을 때 `사제왕 요한'은 몽골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에 대해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살피며 흥미를 유도한다. 이 책은 그동안 자료가 많지 않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네스토리우스교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으며, 풍부한 도판과 삽화, 지도 등을 실어 이해를 돕고 있다. 인터뷰 / 김호동 교수 최근 〈동방 기독교와 동서문명〉(까치 펴냄)이라는 책을 발간해 화제를 모으고 있는 김호동 교수(서울대학교)를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연구실에서 만났다. Q. 신학자가 아니신데 기독교의 역사를 다룬 책을 집필하시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A. 사실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닙니다. 전공분야인 동양사학을 연구하다 보니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에는 기독교가 서양의 종교로 자리잡고 있지만 1천년 더 이전에 이미 기독교는 동방 곳곳에 퍼져있었다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특히 몽골 쪽에는 상당히 많은 수가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사람들은 잘 모르죠. 교리나 전파 과정을 밝히기보다는 동방 기독교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뤄졌던 동서간의 문화적 교류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뤘습니다.Q. 중앙아시아와 기독교의 역사적 관계를 개략적으로 설명해 주십시오.A. 지리적으로 중앙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서양과 동양의 문명을 잇는 가교 역할을 했습니다. 기독교는 특히 무역상들이나 여행자들을 통해 전파됐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사실 기독교뿐만이 아니었죠. 이슬람, 마니교, 토나스트교, 불교 등 여러 종교가 공존했습니다. 종교의 전파가 활발하게 이뤄졌지요.Q. 네스토리우스교가 동양에 형성된 배경은 어떻습니까?A. 역사적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기독교 형성의 초기시대에는 기독교의 본질을 두고 여러 가지 논쟁이 많았습니다. 네스토리우스가 주장한 교리에 대해 논쟁이 일었던 431년에 열린 제3차 에베소공의회에서는 순수교리 입장보다는 정치적 싸움의 결과가 작용했다고 봅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정죄를 받았고, 로마제국에서 금지됐습니다. 그를 따르던 이들은 박해를 피해 동쪽 페르시아제국을 거점으로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의 두 가지의 흐름이 있는데,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그리스 로마적인 전통과 이라크의 시리아적 전통, 네스토리우스교는 시리아적 전통과 결합돼 동방교회로 자리잡아갔습니다.Q. 네스토리우스의 개인적 성향에 대한 설명과 그의 이단 정죄 과정에 대한 역사학자로서의 견해를 말씀해 주시지요.A. 네스토리우스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이단으로 보기 힘들다는 판단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 소견으로는 그들은 결코 이단자도 아니었고 타락한 교인도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2장 `동방으로'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네스토리우스의 이단 정죄 과정을 보면 정치적인 요소들이 많이 작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현시대에서도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정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의 교단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또 중세의 마녀재판과 같이 성경의 핵심적인 교리에 대한 문제제기 보다는 지엽적 문제를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부풀려 이용하는 경우도 역사 속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요점은 현재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이 지금의 것에만 연연하지 말고 이러한 역사적인 맥락에서 더욱 깊은 시각으로 종교를 이해할 수 있다면 이기적인 모습을 조금은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찬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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