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시스의 최고 소망은?- 주여, 그 다섯 상처를 내게 은혜로 주소서 - 프란시스의 그렛치오 산 골짜기 기도의 시간이다. 수도실에 엎드려 기도 하였다. 부활절이 다가오는 시기여서 찾아 왔던 것이다. 프란시스는 변장을 한 몸으로 그렛치오 산 초암 수도원을 찾은 것이다. 헌모자를 푹 눌러쓴 거렁뱅이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유명한 프란시스를 그들은 늙고 병든 거지로만 보고 있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위해 제발 이 병든 늙은이에게 적선을 부탁합니다'하는 그는 목소리까지 바꾸어 말하는지라 그 솜씨에 모두가 속은 것이다. 수도자들의 허락으로 간신히 수도원 안으로 들어선 프란시스는 탁발용 바릿대를 내 밀어 형제들에게 한 조각 빵을 얻었다. 빵을 손에 쥐고 먹으려던 프란시스가 입을 열었다. `형제 여러분들의 식탁이 너무 고급이군요. 집집 문전을 찾아 걸식 탁발을 하러 다니면서 다른 수도회보다는 휠씬 더 구세주의 겸손을 배우려 한다고 소문난 가난한 수도단체 수도자들이 지나치게 고급입니다.' 수도자들은 아궁이 턱에 앉아 빵을 뜯어 먹는 프란시스를 아직도 알아보지 못한 상태에서도 거지노인의 충고를 그들은 받아들였다. 모두들 죄송스럽다는 표정이었다. 프란시스는 껍데기는 물론 뼈속까지 나사렛 예수를 닮아 있는 사람이다. 초기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화가 있다. 제자들과 함께 늘 소박하고 초라한 식탁에 익숙해 있었는 데 어느날 식탁은 신도들이 고기를 가져와서 풍성했다. 제자들이 고기 국물에 걸신이 들려 먹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이 지켜보던 프란시스는 화롯불에서 재를 한움큼 쥐어 국속에 뿌려 버렸다. 프란시스는 주의 은혜를 입고 수도단을 만들어 제자들을 길러 섬기듯이 살아오면서 청빈과 겸손을 생명처럼 여긴 인물이었다. 1224년 9월, 프란시스는 알 베르나 산 절벽으로 올라갔다. 순교의 각오를 하였다. 금식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가 기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은 1096년에 1차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지 130년이 가까워 오지만 전선이 엉망이었다. 유럽의 각 국들은 십자군 전쟁기에 더러 용맹을 보이기도 했지만 많은 실수와 실패를 하였다. 십자군 전장에도 가 본 일이 있는 프란시스는 교회의 위기를 뼈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다. 진리가 무엇인가? 그 역시도 20대 초까지는 거만을 떨기도 하였고, 중세의 귀족이나 부잣집 자식들처럼 방탕하게 살았던 일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주 예수의 부름을 받은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살아왔다. 그의 성품은 천진난만해 보이기도 하지만 대담하고 민첩한 면이 있었다. 십자군 종군시절의 이야기 한 토막이다. 프란시스의 목표는 무혈 십자군이다.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동시대의 도미닉 수도단이 유혈 십자군을 옹호했다면 프란시스는 철저한 비폭력을 주장했다. 십자군 전쟁터에서 프란시스는 포탄과 화살이 날아다니고 칼이 번뜩이는 곳에서도 비무장 단신으로 전선을 돌파하여 이슬람 술탄을 만나 담판을 벌려 술탄을 감동시킨 바가 있었다. 프란시는 그의 수도단을 사실상 빼앗겼다. 그의 사상인 탁발과 거리수도단 정신을 포기하도록 강요받은 수도단이 `프란시스의 이름'이면 무슨 소용인가. 프란시스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었다. 알 베르나 산 꼭대기 프란시스의 거룩한 육신은 차츰 쇠잔해 가고 있었다. 그는 기도했다.  `아버지여, 내게 선물 하나만 주세요. 주님을 닮고 싶어요. 주님의 육신 주님의 영을 그대로 닮고 싶어요. 주님의 두손과 두발, 그리고 그 옆구리의 상처도 그대로 저에게 주세요. 이 은혜 하나만 내게 주신다면 더 이상 바라지 않겠나이다.' 프란시스는 주님께로 부터 이 은혜, 이 성흔(聖痕)을 받았다. 그의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옆구리에서 거룩한 예수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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