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키스탄서 네스토리우스 집회소 확인
 
 중국 현장을 찾아다니다가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을 찾아갔다. 네스토리우스가 에베소 공의회(AD 431년)에서 이단정죄를 받고 쫓겨난 이후 그가 머물다가 세상을 떠난 리비아 사막, 이집트 사막, 수리아 사막을 나는 일찍이 찾아간 일이 있었다. 그가 로마와 로마교회가 퍼부어대는 저주를 온 몸으로 받으면서도 반드시 복권 하리라, 반드시 다시 일어서리라는 열망과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살아남기에 집념을 보였던 것도 안다. 그는 척박한 사막의 동굴에서도 시간을 아끼면서 `그의 기독론'을 보충해 가면서 로마 교구(오늘의 로마 가톨릭)보다 더 뚜렷하고 자신감 넘치는 `기독교 교리'를 확립하고자 했었다.

# 중국 `카타콤'서 신자들을 대하니
나는 지난 9월 15일 인천공항을 떠나 중국 신장 위구르 지역인 우르무치 공항에 내려 호텔에 여장을 풀고 하루밤 쉬었다.
아침에 일어나 조선족 교회 사역자의 안내를 받아 교회로 갔다. 설교를 했다. 한동안 말씀에 굶주린 우리들이니 시간 제한 없이 설교해도 좋다는 언질을 받고 넉넉하게 말씀을 나누었다.
20명의 조선족 남녀, 뜨겁고 간절한 눈길을 느끼면서,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카타콤 시대(AD 33~312) 어느 동굴에 모인 신자들을 대하는 기분이었다. 아파트 문을 단단히 잠그고, 공안원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면서 망을 보는 사람들도 있으니 어찌 이 시대를 21세기 중국 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중국에는 현재 당이 지휘하는 삼자교회(三自敎會)와 가정교회(지하교회)가 있다. 이 두 집단을 합하면 1억명 정도는 된다고 한다. 유럽 기독교는 18세기 이후 잘 준비된 중국을 자유민주세계로 이끌지 못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당시 유럽의 정치판은 교회의 세계관을 좇았으니 오늘의 중국 내 비기독교 현실은 중국 근대사에 깊숙히 개입하여 제국을 훔치려 했던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의 식민지배욕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
나는 설교를 한사코 사양했었다. 만약 공안원들에게 발각이 되어도 조선족 신자들끼리 모인 것과 외국인 설교자가 예배를 인도하다가 들통날 경우는 벌칙이 다르기 때문이다.

# 아프간의 접경지 타지키스탄
저녁시간 타지키스탄의 `두산베'로 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아프가니스탄의 접경지요, 또 탈레반이 타지키스탄과 키르키스탄에서 `또 한 건'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해서 내게도 움츠리는 기분이 있다.
아프간 인질시태로 온 국민이 짜증스러워하고 있는 때에 `위험지역' 나들이를 하고 있으니 조심스러웠다. 우르무치에서 3시간 정도 걸렸다. 두산베 공항은 규모가 매우 작았다. 나라 전체 인구가 6백여만명이요 수도인 두산베에 1백만여 명이 사는 나라이니 그럴 것이다. 기내에서부터 느꼈지만 여행객들마다 웬 보따리가 저리 많을까 했더니 우르무치에서 물건을 사다가 파는 상인들의 상품들이었다.
공항에는 나를 반기는 이가 없다. 자정이 지나 밤은 깊어가고, 승객들도 많이 빠져나갔는데 공항에서 입국비자를 받아야 하는 나는 난감했다. 여권과 초청장 사본을 들고 여기저기로 기웃거렸다. 간신히 안내를 받아 비자 발급처 사무실 문을 열었다. 직원 한 사람이 내가 내미는 초청장 사본을 받아들더니 그가 이미 가지고 있는 원본과 대조하면서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비자 발급비 56$을 지불하고 입국 절차를 마쳤다. 그제서야 나를 도와줄 이 선생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미 공항에 나와 있었다.

# 네스토리우스에 큰 기대를 하고 있는 선교사
나를 맞이해 준 이 선생은 내가 네스토리우스 자료 탐사차 방문한 것에 대하여 매우 큰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도 또한 지난 5월 키르키즈의 비쉬켁 중앙아시아 선교사회 시니어 그룹이 모여 실크로드 지역에서의 네스토리안 선교사들의 활동에 대한 깊숙한 탐색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그는 `내가 활동하고 있는 선교현장에 이미 1천여년 훨씬 이전에 네스토리안들이 수백년동안 선교활동을 했다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내가 머무는 5일 동안 최선의 서비스를 약속했다. 나는 여기 살면서 살피지 못한 곳들을 일부러 찾아온 것을 감사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선교 조직망을 총동원하여 지방 박물관들을 통해서 자료를 찾았다.
우선 두산베 남부 아프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국경선 가까이 싸르투스 지방, 아프칸 국경선 동쪽 피안즈 지방, 천산산맥 너머 키르키스탄 국경 가까이에 있는 탄자민트 지방까지 나를 안내할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이렇게 감사 할 수가…. 모처럼 만나는 행운이었다. 우르무치 조선족 출신 사역자 배선생도 내게 넘치는 친절을 베풀었다.
다음날 아침 이 선생과 함께 싸르투스 지역을 향해 갔다. 찾아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두산베'에서 아침 9시 출발하여 `구르칸 투베'를 지나, `칼하자보드'에서 1년 전에 싸르투스 네스토리안 유적지에 한번 다녀왔다는 이 선생의 동반 사역자인 `샤샤'를 동승시켰다. `카바디안'과 `아이반지'까지를 찾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카바디안 박물관'에 들어가서 아랍어와 그리스어에 능통한 관장 노사리쿠시랍과의 별도의 대화시간도 가졌다. 3500년 전에 세워진 도시인 카바디안에 대한 자부심을 말하는 그에게 우리도 역사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지금 네스토리안 기독교 활동 근거지에 찾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두산베에서부터 타지키스탄 전역을 돌아 다니면서 느끼는 도시 분위기에서 이슬람권이라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그들의 몸놀림이 가볍다. 히잡이나 차도르를 착용하지 않은 여인들이 다수이며, 학생들은 동유럽 국가들 분위기만큼 활달하고 평안해 보였다.
70년 공산치하를 겪으면서 전통적인 이슬람 신앙이나 풍습이 느슨해진 것 같다고 이 선생은 말했다. 이슬람 인구는 수니파가 절대다수를 이루고 쉬아는 5%정도이다. 전체 이슬람 통계를 70% 또는 80%로 추정한다. 상대적으로 기독교는 1%정도로 볼 수 있으나 소비에트 공산시대를 거친 후 다시 백지에서라고 생각하면서 이슬람과 기독교가 동등한 위치에서 타지키스탄을 위해서 봉사할 수 있다고 이 선생은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타지키스탄 지역에 1000개처의 작은 교회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현재 18개처이니까 미미하지만 가능하다고 그는 말했다.
샤샤의 기억력에 의존하다가는 일이 쉽지 않을 것 같다. 시간은 오후 2시, 싸르투스와 피안즈를 오늘 동시에 답사를 끝내야 하는데 어찌하나? 그렇다고 샤샤를 다그칠 수 없다. 묻고 또 물어 방향을 잡았다. 국경경비부대를 만나서 실마리를 풀었다. 저 너머로 아프가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의 국경표지 철책이 눈에 들어온다. 기분이 묘했다. 더구나 여권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어제 사무실에 맡겨두었다. 타지키스탄은 입국비자를 받았다해도 만 3일 이상 체류자를 `주민등록'을 해 두어야만 출국시에 탈이 나지 않는다해서 여권을 두고 지방에 내려온 것이다.
국경 수비대 초소 안으로 갈 수 없어서 나는 차 안에 대기하고 이 선생이 찾아갔다. 그들은 잘 다녀오라고 했다. 우리는 차를 몰았다. 샤샤가 차를 멈추게 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지 않다. 쾌청한 날씨는 좋으나 확 트인 도로 좌측으로 국경선 철책이 차에서 손을 내밀면 손에 잡힐듯 했다.

# 드디어 발견
파미르 고원에서 흘러내리는 `피안즈 강' 줄기 1,100km가 아프카니스탄과 타지키스탄의 국경선이다. 시퍼런 강물이 햇빛에 반사하여 싸늘하게 보인다. 평화로움을 말하기가 어려운 시간이기에 파미르 고원의 오염되지 않은 강물이 싸늘하게 보인 것 같다.
우리는 차를 돌렸다. 국경수비대에서 20분은 더 가야 하는 네스토리안 활동 근거지까지는 너무 멀었다. 두려웠다. 우리는 국경수비대 대장을 찾아갔다. 우리는 한국인들이다. 엊그제 일어난 탈레반 피랍을 그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대장이 따라 나왔다. 잘 생긴 42살의 군인, 자동소총을 오른손에 쥐고 우리 차에 올랐다. 총 한자루 쥔 군인 한 명이 무슨 큰 도움이랴. 그러나 아프카니스탄 국경에서 조효근 목사가 무슨 사고라도 나면, 무슨 꼴인가. 우리 일행은 그것을 먼저 걱정했다. 이 선생의 경우는 납치도 당해 본 일이 있고 목숨을 내놓아야 할 지경에도 당해 보았다지만 그는 이곳에 체류하는 사람이고 나는 방문자인데, 엊그제 사고(아프간)가 터졌는데 또 위험지역에 와서 불상사가 난다면 개인의 피해 문제가 아니라 영 좋지 않을 것만 같았다.
우리 일생은 네스토리안들의 활동지에 왔다. 그들의 동굴식 집회소가 16개, 그 중에 동굴 마주 바라보는 좌측으로부터 6번째는 중앙 집회소인 듯한 십자가 형태의 동굴이 있다. 벽면에 수리아어인 듯한 글씨가 곳곳에 써 있는데 판독이 쉽지 않았다. 이 글들이 네스토리안들의 주거지 또는 집회소임을 증거하는 표가 따로 있다. 우측으로부터 2번째 동굴 천정에 뚜렷하게 음각된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단의 십자가 문양이 너무도 선명했다.
우리 일행은 감탄했다. 야, 이런 산 언덕에 우리들의 선교역사가 기록되었다니…. 네스토리안들은 페르시아를 떠나 아프가니스탄을 경유하여 피안즈 강줄기를 따라 이곳에 중간 활동지를 삼았을 것 같다. 좌측으로 10km만 더 가면 우즈베키스탄 국경이 나타난다. 또 다른 경우는 14세기 몽골 제국이 붕괴되자 몽골 재건 군주로 자임하면서 등장한 아므르 티무르(Amur Timir)의 폭압에 시달리던 네스토리안들이 쫓기면서 키르키스탄 쪽에서 건너 왔을지도 모를 일이다.

# 발바닥이 닳도록 탐사하는 이유
오늘은 더 이상 긴 이야기로 네스토리안들의 신상을 말할 시간이 아니다. 내가 네스토리우스의 신세(팔자, 한국식 표현)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48년 전 1959년 11월부터이다. 그때부터 네스토리우스와 무함마드의 이슬람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주 예수는 내게 `내 교회를 바로 세워다오'라 하셨고 나는 내게 권능을 주신다면 가능타고 말씀 드린 바 있다.
그날 이후 꽤 긴 시간이다. 반백년의 시간 동안 공부했다. 20년 전부터는 발바닥이 닳도록, 어떤 때는 더 극심한 여행 중 고통을 당하면서, 심지어 외국을 다니면서 노숙(길바닥 잠)까지 해 보았다면 더 말해 무엇하랴.
나는 기독교를 고치고 살려내는 명약 중의 명약은 `이슬람'과 `네스토리우스 교단'이라고 단정한다. 이 두 고통의 실체를 기독교가 소화해 내야 한다. 기독교를 완전한 기독교로 성숙시키는 교사가 무함마드요 네스토리우스라면 나를 비웃을 자들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한계다. 반드시 기독교는 무함마드와 네스토리우스의 벽을 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무함마드의 이슬람을 하나님이 인정하는 완전한 진리의 집단으로 만들어야 하고, 네스토리우스는 유럽기독교와 동등한 자격과 신분을 지닌 아시아 기독교의 대표자로서 그들이 이룩한 1천년 아시아 기독교를 정사(正使)에 편입시키는 일이다.
참, 나는 오늘 아침 이 선생의 집에서 (아시아) `기독교 부활'(가제)이라는 이름으로 집필하는 네스토리안 선교역사 제1권 첫 줄을 쓰고 유적답사에 나섰다. 제5권까지 쓰면서 그들의 1천년사를 복원해 볼 요량이다.
나는 동굴씩 예배당, 예배처이며 피난처인듯한 동굴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피안즈 강 쪽으로 출입문으로 하여 길이 4m, 폭 2.5m, 높이 2,5m쯤인데 앞쪽 출입구를 제외한 3면 흙을 턱을 지게 깎아 의자처럼 만들어 놓았다. 상당히 정교한 암벽토굴이다.
자, 우리 모두 이곳으로 모이시오. 우리는 기도하였다. 역사의 흔적 뿐인 현재까지의 자료 상황은 후속으로 이어진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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