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멍구(내몽골) 네스토리안을 찾아서

 이 선생의 마음은 간절하다. 나는 네스토리안들이 활동했던 현장에서 선교사 생활을 하고 있으니 언제든지 ‘그 현장’을 찾아갈 수도 있고, 또는 새로운 역사발굴이 있을 때에 동참할 수 있으나 조 목사님은 먼 길을 일부러 오셨는데 단 한가지라도 더 보고 들을 수 있게 해야겠다는 것이다.
고마운 친구다. 이 선생은 피안즈 지방에서도, 산길을 따라 깊은 산골을 향할 때에도 그의 선교활동용 승합차 스포티지가 망가지건 말건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렸다.
그러나 나의 일정은 우름치, 서안, 그리고 네이멍구(내몽골) 지방까지 찾아가야 한다. 공항에서 나를 떠나보내면서 그는 내년 봄에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경유하여 탄자겐트로 가는 길에 동행을 약속했다. 4월 말쯤으로 예상하는데 들소리 31주년 기념으로 우즈베키스탄과 타지키스탄, 그리고 키르키스탄을 경유하여 우르무치(중국령)로 향하는 탐사계획을 계획 중인데 그때 함께 동행하기로 했다.
탄자겐트 지방에 가면 네스토리안의 유적과 조로아스터파의 유적이 많이 있다. 금번 여행계획에 들어있으나 두산베 남쪽과는 달리 탄자겐트는 천산산맥이 가로질러 있어서 육로를 따라 가기가 쉽지 않다. 명년 4월로 미루고 나는 우르무치로 향했다. 박물관에 다시 들러 중국이 ‘신강지역’ 통치 강화를 하고 있는 것을 다시 확인했다.
서안에 준비해 둔 자료를 정리했다. (중국의) 삼자교회와 사귐을 시작했다. 네스토리안(경교)의 중국활동과 그들과의 관계를 물었다. 삼자교회 목회자들은 나의 제안에 매우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자기 교회에서 ‘광고’를 해주겠다고 나선다. 나는 이 대목에서 깜짝 놀랄만한 힌트를 얻었다. 발표를 뒤로 미루겠으나 이는 중국교회 역사와 삼자교회 역사가 어디에 귀속되어 있으며 또 네스토리안의 역사와 중국교회 및 삼자교회의 운명적 관계를 직감하게 된 나의 제 6감(영감)에 대한 자부심을 자신하게 된다. 삼자교회가 변하고 있다. 중국선교 관계자들은 그들이 교회의 머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보지 않는 점과 1949년 이후 수많은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핍박하고 고발했다는 말을 하지만 그것은 옛 일이다. 그리고 교회의 머리가 공산당이라고 해봐야 그래도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삼자교회 주장과 관계없이 교회의 머리 되신다.
서안의 삼자교회 苟 목사는 자기들도 일반교회들과 사귀기를 원한다고 친근감을 표하며 그가 알고 있는 자료와 값진 화보 한권을 내게 주었다.
나는 네이멍구로 향했다. 예정시간보다 10분 먼저 이륙하는 30명 정원의 쌍발 프로펠러. 정원 모두 탑승했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서안 국내선 공항에서 이륙한지 40분쯤 후에는 아름다운 사막이 바다처럼 펼쳐진다.
다음날 나는 후어호터 시내 신성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삼자교회였다. 교회당 가득 매운 성도들, 나는 남녀 좌석 구분인 줄 모르고 여자들 좌석에 있다가 안내인의 인도로 자리를 옮겼다.
오후에는 서점가를 찾아갔다. 네스토리우스나 그의 교단 자료 및 중국교회사 속에서 ‘경교’로 표기되는 자료 등 13권의 책을 구입했다.
네이멍구 탐사기간 동안 나를 돕는 김 선생은 내게 ‘이상한 일입니다. 자료가 이렇게 많은데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를 연발했다.
‘그들이 숨어버린 것입니다. 오늘의 세계 기독교가 그들 네스토리안들을 괄시하고 외면하니 숨어버릴 수 밖에요….’ 나는 오늘의 누구에게도 이같은 말로 네스토리안들의 슬픈 역사를 대변한다.
네스토리우스는 AD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에서 이단정죄를 받고 추방을 당한 이후, 오늘날까지도 기독교로부터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로마교회의 정치판이 혼탁하고 황제가 교회 일에 너무 깊숙이 관계한 부작용이 나타난 것인데, 억울한 사람은 네스토리우스였으나 하는 수 없었다. 황제가 곧바로 ‘사면’을 했으나 역사교회는 네스토리안들의 활동을 소홀히 여겼다. 종교개혁기에 이르러서도 루터나 칼빈파가 양해와 이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는 이미 그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역사의 지하층으로 몸을 숨긴 뒤라 그들의 복권은 아직도 흐지부지다.
네스토리안의 숨은 역사, 잠자는 역사, 죽은 역사를 깨워 일으키고 살려내고자 나는 많은 날 동안 수고를 하고 있다. 네이멍구 지역 선교사들 5명과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몸이 불편함을 느꼈다. 어젯밤 감기에 걸린 것이다.
늦은 시간 공항에서 김 선생과 만난 나는 저녁식사후, 조선족 식당 주인이 잡아둔 호텔에 갔더니 350위안이다. 너무 비싸다. 나의 여행은 150위안 이상 지출은 어렵다. 김 선생과 함께 더 값싼 호텔(숙소)을 찾으려다가 마땅치 않아 김 선생 집으로 갔다.
그날밤 나는 젊은 부부가 자는 침대에 그를 대신해 몸을 눕혔다. 미안했다. 그러다보니 침구를 제대로 덥지 못했던가 보다. 그래서 몸살감기가 나를 덮친 것 같다.
추석 전날 밤이다. 고향 생각까지 겹쳤을까. 120위안짜리 숙소에 몸을 눕히기 전 샤워를 하려다가 추위에 포위되었다. 더운 물이 나오지 않아서 옷을 부랴부랴 다시 입었다. 그래도 추웠다. 나는 타월에 물을 적셔 발을 대충 씻고 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간신히 몸을 달구었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Who is it?' 나는 힘껏 고함질렀다. 김 선생이었다. 착한 사람, 늙은이가 호텔 방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가는 뒷모습이 마음에 밟혔을까? 감기 기운에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한 내가 불쌍했을까? 추석 명절 전날 밤인데, 그도 혹시 조금은 외로워서였을까? 그는 들고 온 봉지를 풀었다. 어린아이 머리통만큼한 배와, 또 사과와 과자들을 꺼냈다. 차도 한잔 끓여서 내 앞으로 내민다.
눈물겹다. 나는 지난 20여 년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활동의 흔적찾기, 이슬람 종파의 모습 찾기 등 70여 개국 또 각기의 도시들을 계산하면 국제선 타고 출국하기가 100여 회는 더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오늘밤처럼 씁쓸하고 힘든 밤은 없었다. 내가 벌써 늙고 있는가? 앞으로도 30여 년은 이 육신이 버티어 주었으면 하는데…. 그러나 내가 결심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럴 때면 하늘을 우러러 위엣 분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겨우 나의 일인가.
〈조효근/본지 발행인〉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