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들아,누가 너희를 불러 냈느냐?
 
  피안즈 지방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싸르투스에서는 정반대가 되는 곳이다. 싸르투스가 우즈벡지역이니까 서쪽이다. 피안즈는 파키스탄 방향에 자리하고 있어서 동쪽으로 그 반대방향이 된다. 우리가 만약 지금 곧바로 피안즈로 향한다 해도 그곳에 도착하면 땅거미가 질 터이니 오늘 일정은 이미 끝났다.
어떻게 할까? 수도 두산베까지 철수할 경우 내일 다시 국경까지 내려와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러나 마땅한 숙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피안즈 반경 50km까지는 군사작전 지역에 해당하기 때문에 외국인들이 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현지인 사역자들의 의견이었다.
우리 일행은 중부지방으로 들어왔다. 칼하자보드이다. 마침 동역자 현지인 샤샤가 사는 도시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해가 떨어지니 거리는 금방 시들했다. 가을이 오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할 시기인데, 밤이 깊어지니 50년대의 한국 농촌같은 분위기였다. 가난하니 공기는 청정하고 밤 하늘은 수정처럼 맑았다.
호텔을 잡았다. 저녁을 먹고 목욕탕으로 가서 몸을 씻었다. 사우나 시설이라 했으나 어설프기 그지 없었다. 북유럽 일부 지역이나 러시아 방식이라고 하는데, 물병에 물을 담아서 탕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지펴놓은 탱크에 물을 쏟아 부었다. 곧바로 탕 안에는 증기로 가득해진다. 뜨거운 증기가 우리의 몸을 데워주려하지만 넉넉하지가 않았다. 이 나라의 형편이겠지하면서 대충 몸을 씻고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이게 무슨 호텔인가? 대궐만큼이나 큰 건물 2층으로 올라갔더니 호텔은 커녕 시골 동네 사랑방 수준이었다.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방에는 아프리카 마사이들의 방같은 곳에 나무판를 잘라서 만들었다 싶은 침대 두 개가 출입문의 양쪽에 있었다. 그리고 둥그런 탁자 하나가 더 있었다. 종업원이 떠난 후 출입문을 살펴보았다. 안으로 잠그는 자물쇠가 없다. 옛날 시골의 헛간문 단속할 때 긴 못을, 그것을 절반쯤 휘어서 문이 바람결에 따라서라도 흔들리다가 열리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그런 식이었다. 나는 동행인 이선생을 어이없다는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식이었다.
나는 방을 바꿔달라고 지배인을 찾았다. 이 선생이 뛰어나갔다. 잠시 후 이선생은 종업원을 대동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방을 바꿔달라고 강하게 요구하였다. 이 선생과 종업원은 빈방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나는 자포자기였다. 그러는 중에 방에 화장실이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없었다. 건물 전체 안의 어디에도 화장실은 없었다.
건축물은 불량품이었다. 전체의 크기가 1천여평 은 될법한 우람한 건물인데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다니 이게 어디 될 말인가. 화장실은 건물 뒷마당을 지나서 별도의 위치에 있었다. 이는 화장실이 아니고 뒷간이었다. 50년대식 뒷간이었다. 타직스탄은 한국과 이것 말고도 유사한 풍습이 많이 있다.
어찌하는가. 머리가 어지러웠다. 문을 안으로 잠그지 못하면 자다가 도둑이 들어오기도 하는 등 불안하다. 더구나 군사지역은 벗어났다지만 아프가니스탄의 접경이 분명한데 기분이 좋겠는가. 더구나 건물 밖으로 나가야 하는 화장실은 내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밤이면 두 번 이상 화장실을 가야하는데 어찌한단 말인가. 울고 싶었다. 하는 수 없다. 참는 수 밖에. 밤참으로 준비한 수박을 절반만 먹고 잠을 청했다.
이 선생은 몸을 뒤척이기는 하지만 잠이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우러렀다. 그 순간 하마터면 아, 하고 소리지를 뻔 했다. 맑고 파란 하늘에는 어린아이 주먹만큼한 별들이 손에 잡힐듯한 거리에 흐드러져 있었다. 야, 기분 좋다. 나는 기분 좋은 밤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 성경책을 꺼내어서 눈이 아플때까지 읽었다. 눈을 식히기 위하여 책을 덮고 하늘을 향했다. 하늘은 여전히 맑고 멀리서 개짖는 소리도 들린다. 고즈넉하다. 타지키스탄 사람들의 잠꼬대 소리가 들리는 듯 그렇게 밤은 내게 환상의 나래를 펴고 가까이 달려들었다.
갑자기 아브라함 생각이 떠 올랐다. 아브라함의 하늘도 이랬을까. 별들을 다 헤아릴수 있을 만큼 하늘은 투명했다. 손을 휘저으면 별들을 하나 둘 쯤은 따 낼수 있을 만큼의 착각이 들었다.
아브라함, 그는 저 별들 세계 너머에서 들려오는 주의 음성을 들은 사람이다. 저는 한 민족의 조상이지만 ‘한’이라는 말을 숫자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크다'라는 뜻인 `한'이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어야 한다.
기독교가 하나의 민족의 주인(조상)으로 아브라함을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해 본다. 편견과 아집이란 작은 규모의 이해력을 말하겠는데 이는 기독교의 협소함을 꾸짖어보려는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편견과 아집이란 자기 이익을 위하여 논리를 조작하고 억지를 부리는 행위를 두고하는 말이다. 다시말하면 큰 생각을 만들어 낼수 없는 사람, 하나님을 ‘하나'라는 숫자로 해석하려는 사람, 하나의 하나님, 좀더 수식한다면 한분이신 하나님으로 표기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는 표현 기법상 아쉬운 해석이다.
하나님을 말할 때 ‘크신 분’, ‘비교할 수 없는 분', 그리고 `오직 하나이신 분', `유일하신 분', 더 나아가서 `우주안에 가득하신 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아량과 여유가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바로 이렇게 해석해 낸 사람이다.
아브라함이다. 저 하늘 별들의 유혹에 현혹되지 않은 사람이다. 현란하고 아름다운 것들에게도 넋을 빼앗기지 않은 사람이 아브라함이다. 그는 인류사가 겨우 문명에 진입하던 시대의 사람인대도 불구하고 ‘시대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았던 탁월한 인물이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면서, 타지키스탄의 하늘에 걸린 별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왜 아브라함을 이 시간에 떠 올리고 있을까.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솔직히 말해서 밤길이 무서워서 화장실 가기를 망설이던 내가, 밤이 떠나고 아침이 오기까지 방문을 걸어잠그는 장치도 없는 방에서 두려워서 떨면서 나는 아브라함을 떠올리면서 위안을 삼는 것이다.
내 곁에서 잠을 자는 이 선생을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곤에 지친 그는 몸을 내 던지듯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그의 말이 떠오른다.
“나는 타지키스탄에 살면서 선교역사의 대 선배들인 네스토리안들이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는 땅에 이미 나보다 먼저 천년 또는 그 이상의 때로부터 활동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경의를 표하고 있을 때, 조 목사님이 이곳에 오셨지요.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부터 나는 조 목사님의 네스토리우스의 선교역사에 대한 열정을 부러워하면서 도와드리는 것이 내 몫이라고 생각했지요. 멀리 한국에서 이곳까지 오셨는데 한 군데라도 더 찾아 가 볼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도와드리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지요”.
처음 그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이 시간 그가 단잠을 자 주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내게도 이시간 아버지 하나님이 평안과 휴식과 안녕을 주시기를 갈망하고 있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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