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57년이 되는 해이다. 하지만 몇년전부터 불거지기 시작한 친일 잔재 청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에 본보는 일제시대부터 역사적인 6·15 남북정상회담까지 친일을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마련한다.〈편집자 주〉 `학도병 출진의 북이 울렸다. 그대들은 여기에 발맞추어 용약(勇躍) 떠나련다! 가라, 마음놓고! 뒷일의 총후는 우리 부녀가 지킬 것이다…. 학병 제군 앞에는 양양한 전도가 열리었다. 몸으로 국가에 순(殉)하는 거룩한 사명이 부여되었다. (뒷일은 우리가) <조광> 1743.12. 윗 글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박사이며 전문학교의 유일한 여성교장, YWCA창시자 등의 직함을 갖고 있던 김활란 박사의 글이다. 이 글의 내용은 `뒷일은 여성들이 책임질테니 남성들은 징병제에 참여하라고 독려'하는 글이다. 김활란 박사는 이 외에도 1939년 6월 `동양지광'에 `부인들끼리의 애정과 이해-내선 부인의 애국적 협력을 위하여'를 게재, 1941년 12월 임전보국단결전 부인대회 및 강연회에 연사로 나서 `여성의 무장'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했으며 1942년 2월 싱가포르 공략 대강연회에서 `대동아건설과 우리 준비' 강연, 1943년 12월 26일 매일신보 `남자에 지지 않게 황국 여성으로서 사명을 완수' 등의 글을 썼다. 또한 `아마기 카츠란' 이란 이름으로 창씨개명까지 했다.  김활란 박사의 모교인 이화여대에서는 몇 년전 김활란 박사를 기리는 상을 제정하기로 했다가 이와 같은 친일행적이 문제가 돼 포기한 일도 있었다. 친일파 청산문제. 사실 친일파는 그 동안 우리에게 있어서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위의 예에서 보듯 친일파 청산 문제는 우리사회에 또 다른 갈등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과거는 깨끗하게 청산하고 가야한다는 여론과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나가자는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실정이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처리는 당연히 곧바로 해야 하는 민족적 과제였다. 하지만 왜 해방 직후인 미군정 시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3년이 지난 반민특위 때 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까? 이것은 미군정에 대한정책에 기인한 것이었다.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고, 궁극적으로는 친미반공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1942년부터 신탁통치정책을 구상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구상은 해방 직후 한반도의 상황에서 어려움에 부딪혔다. 미군 진주 전 한반도는 전국에 건국준비위원회의 지부인 인민위원회가 전국 90% 이상의 지역에 조직되었으며, 중경임시정부도 사회주의적 강령을 내걸 만큼 변혁적 상황이었다. 반면 미국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는 단지 ‘수백명’뿐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제 시기 관료기구를 유지하면서 친일파를 적극 활용하는 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북한사회는 해방이후 인민재판 등의 절차를 통해 친일파를 깨끗이 청산한 상태이다. 민족문제연구소 조세열 사무총장은 “북한 역시 친일파 청산을 체계적으로 하지 못했다”며 “하지만 많은 친일파들이 남쪽으로 넘어오고 또 북한 내부에서 인민재판을 통해 결과적으로는 깨끗하게 청산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북한이 친일파 청산문제에 있어서 남한과 대비되는 가장 큰 차이는 처벌이 일방적 하향식이 아닌 민초의 뜻에 따른 상향식 청산작업이었다는 점이다. 특별법과 같은 공적인 장치는 오히려 일반 민초의 처벌기준에 비하면 왜곡될 소지가 많다. 그들의 곁에서 그들의 잘못된 행위를 직접 목도해 온 일반 민중의 잣대보다도 정확한 기준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을 감안하면 우리나라 역시 민초의 자발적인 과거청산 노력을 지원했더라면 가장 확실한 과거청산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견해가 돋보인다. 조 사무총장은 “남한의 친일파 청산은 통일이전에 잘못된 과거사를 깨끗하게 정리하자는 의미도 있다”며 “(친일파 청산은) 북한과의 공동의 역사의식을 세우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해방이후 만들어진 반민특위가 친일파 청산을 기도한 것은 2차대전 말 프랑스의 드골장군이 나치 협력자를 ‘숙청한’것과 같은 성격의 과거청산방식으로 해석된다. 왜냐하면 민족반역자에 대한 재판을 통해 인적 물적 청산을 집행함으로써 새 민족공동체에서 친일파를 제거해 민족적 정통성과 국가의 도덕성을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오히려 친일파와 합작해 반민특위의 역사적 청산작업을 좌절시킴으로써 매국세력을 집권 세력으로 재등장시키는 엄청난 과오를 저질렀음이 드러난 그들의 논리는 친일파를 숙청하고 나면 해방이후의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인재들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그 당시 이승만 정권이 친일파를 과감하게 처단하지 못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 답은 국내적으로는 친일파를 숙청하면 인재부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고 국외적으로는 미국에서 찾을 수 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권력이 존재하는 가운데에서는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당시 미국의 입장은 남한이라는 작은 국가의 역사를 올바르게 잡도록 하는데는 거의 무관심했고 오직 그들의 체제에 도전하는 사회주의 세력을 억제하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소련보다 뒤늦게 한반도에 진주한 미국의 선택은 질서유지와 친미정권을 세우는데 힘을 기울였고, 이를 위해 과거 일제의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활용했다는 것이다. 결국 남한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은 미국의 남한 진주에 있다. 미군정이 끝나고 남한만의 단독의 정부가 세워졌을 때 또 한번의 기회가 있었다. 아무리 미국이 친일세력을 그대로 활용했다 하더라도 남한 민초의 요구를 수용한 정부가 세워졌더라면, 즉 이승만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민초의 요구에 부합하는 정책을 폈더라면 일제 잔재 청산은 다른 길을 걸었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친일세력이 남한정부 내에 존재하는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권이 친미적 성향만을 유지할 수 있었으면 그것으로 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민족의 염원을 저버리고 정권을 잡는데만 급급해 절호의 기회를 다시 놓치게 되었고 그 이후 다시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승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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