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28
 
큰 것, 알아주는 것, 권력, 섬김 받는 것
좋아하는 이런 기독교의 모습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고소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부터가 그런 것들이 심겨졌기 때문에 나오게
된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종교는 신적 가치를 추구하며 범사를 세속적인 방법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른 세상사와 구별 됩니다. 그런데 작금 불교의 집단행동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이럴 때 음미해 보고 싶은 이야기가 하나 있어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미국의 조지 부시 대통령이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데 `브로콜리를 넣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이 사실은 입소문을 타고 언론에까지 보도 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브로콜리를 싫어한다'는 이 소문은 전국에 퍼졌고 브로콜리 농장주들은 비상이 걸렸습니다.
 전국의 브로콜리 농장주들이 대책을 세우기 위해 한데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의외로 종교적이었습니다. “거친 항의 대신에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브로콜리를 가득 실은 화물차 한 대를 백악관으로 보내자.”
 그들이 화물차에 브로콜리와 함께 실어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대통령님, 이것은 당신을 대통령으로 뽑아 준 미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채소입니다. 단백질이 많고 철분이 함유 되어 있어서 몸에 상당히 이롭습니다. 생각을 바꾸셔서 이것을 즐겨 드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편지내용과 선물사건이 다시 언론에 보도 되면서 브로콜리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거두게 되었고 브로콜리는 더 많이 팔리게 되었으며 농장주들은 전보다 더 많은 수익을 거두게 되었다고 합니다.
 불교가 본래 그런건지 불교인이 그런건지는 모르겠지만 대승불교라면서 대승적으로 보이지가 않고 호국불교라면서 호국적으로 보이지가 않고 대자대비라면서 자비로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종교차별'이라고 하는데 그동안 문화재 관리명목으로 국가돈 타다가 사찰 관리한 것을 포함하여 우리나라는 사실 불교쪽으로의 종교편향이었던 것을 불교도 알 것입니다. 교계 대표가 검문 받은 것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욱 불교가 작아 보이게 하는 반응일 것입니다.
 영역다툼 , 복수혈전, 힘겨루기로밖에 보이질 않는다는 말입니다. 영역다툼의 뿌리는 욕심입니다. 복수혈전의 뿌리는 미움입니다. 힘겨루기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혹시 `종교차별' `종교 편향'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우리를 우습게 보지 말라”, “우리 앞에 굽신거리거라”는 것 아닌가 여겨집니다.
 대통령이 잘했다고 편드는 것도 아니고 기독교는 잘못이 없다고 변명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각을 세우고 전면전을 선포하는 것은 앙심을 품고 기 싸움을 벌이는 것은 어쩐지 종교적으로 보이질 않고 오히려 편향적이고 편파적으로 보입니다. 이럴 때 대통령을 긍휼히 여기면 대통령보다 큰 것이 되는 것 아닌가요? 종교의 종자가 마루 종(宗)자라, 마루는 꼭대기라는 말 아닙니까? 종교는 그 자체가 정치보다 큰 것이고 대통령보다 높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종봉(宗峰)이 언덕과 싸우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불교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기독교 바로 우리들의 모습, 거울로 보는 기독교의 모습입니다. 큰 것, 알아주는 것, 권력, 섬김 받는 것 좋아하는 이런 기독교의 모습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고소영이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부터가 그런 것들이 심겨졌기 때문에 나오게 된 현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비불교적 불교나 비기독교적 기독교나 이같은 모습은 피장파장입니다.
 예레미야 9:23에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고,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고 ,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고, 자랑하려면 하나님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했는데 하나님보다 더 자랑하고 싶은 것, 높아지고 싶은 것 그것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나타나서 자기 아들만 섬김 받는 좋은 자리에 앉히려고 한 행동이나 그것을 보고 섬김을 받는 자리에 기분이 상하여 분히 여긴 제자들이나 다 예수님의 방법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말석에 앉으라 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는 것은 자기 비움, 낮아짐, 겸허, 겸손입니다.
 그러다보면 얕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는 비결은 `섬기려'입니다. “도리어 섬기려 하고.” 도리어 상대방을 높이겠다는 역설적 자기비하의 방법입니다. `섬기려'의 예수님은 골고다까지 배척을 받으셨고, 무덤에까지 낮아지셨지만, 하나님은 천상천하의 모든 무릎을 그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빌 2:6, 2:9∼11).
 외롭고 힘들어도 본문 말씀대로 `섬김을 받으려 하지 않는 것, 도리어 섬기는 것, 대속물이 되는 것', 억울하고 분해도 그 방법으로, 멀고 험해도 그 방법으로 가야 합니다.
 
안산그사랑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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