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으신 예수, 메시아의 이름으로 우리를 향하여 오시다. 고난의 의미를 아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한 터 고난이 창조의 기본이요 영생의 문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이 고난이요 죽음이며 영생이며 창조인 것을 알자고 공부하는 신자들도 많지 않아서 늘 어려움을 겪는 것이 역사의 교회들이다. 예수의 고난, 고난 주간이 우리 마음을 긴장 시킨다. 교회들마다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주 예수 이름을 부른다. 고난이 고난으로 끝나지 않기 위하여 눈을 부릅뜨라. 1989년도 한국교회는 성장이 멈추고 신자들의 수평이동을 통한 교회 교세의 줄고 넘침일 뿐이라 하니 듣고 있기가 심히 민망하다. 신자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무엇일까? 전도하지 않음인가, 아니면 전도할 수 없음인가. 전도를 해도 듣는 이들이 귀를 막아서라고 해야 하겠지. 왜 귀를 막을까, 전하는 이들의 신실성에 의문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자의 모습에서 고난의 흔적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도마의 의심을 단번에 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은 예수의 옆구리의 창자국이요 손발의 못자국이 될 것이다. 보라, 보고 믿는 자가 되거라 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오늘의 신자들이 가지고 있어야만 신자가 생겨날 것이다. 가난한 자를 먹이다가 고난, 병든자를 돌보다가 고난, 옥에 갇힌 자 방문 했다가 고난, 나그네 돌보다 고난을 당하는,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도 매를 맞거나 쫓김을 당하는 처지로서의 고난이 있을 때 무딘 마음을 열고 사단의 방해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이웃들, 현재 이 시간도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피하여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탈북을 하여 헤매는 동족의 아픔도 고난이요 저들을 불러 의식주 해결은 물론 낯설은 사회에 적응 정착을 할 수 있는 일도 고난의 코스가 된다. 보다 근원적 고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그 고난이 곧 나의 생명을 구하는 속죄와 용서의 고난임을 배워서 아는 믿음이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십자가의 고난을 의인의 고난으로 처리해 버리는데 바로 거기에 기독교의 함정이 있다. 예수의 죽음은 의인의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신하는 속량과 속죄의 죽음이다. 여기까지 배워야 기독교의 기본을 아는 것이요 고난주간의 진정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고난을 피하지 마라. 예수 십자가의 고난의 연속 속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은총의 비밀을 배우라. 신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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