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증오했던가? 언제부터 경쟁했던가? 이스마엘의 아브라함의 상속자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때였나, 아니면 야곱이 에서의 발 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나면서 부턴가. 그래도 사촌인데, 백보 양보해도 은총을 입은 아브라함의 아들들인데 어찌하여 저들의 오늘은 가엾고 불쌍한가. 이스라엘이건 팔레스타인 사람들이건 간에 저들은 함께 불쌍한 사람들이다. 민족주의의 틀을 깨지 못하고, 우월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하고 끝끝내 내가 지배자라고 상대를 짓밟는다. 이스라엘의 자만이나 미국의 백인들이 과신하고 있는 일등주의는 함께 사라져야갈 인류의 종양들이다. 이스라엘이여, 자네들의 선민주의는 메시아의 오심으로 끝났다. 메시아의 선택받은 자식이라고 믿는 크리스찬이나 백인들이여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을 고르게 대접 할 줄 모르면 자네들도 선택에서 밀려난 자들일세. 기독교 사람들이 선교를 열심히 하는데, 과연 저들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주거지에 뛰어들어 수십여년 동안 이스라엘에게 시달리며 인간기본을 획득하지 못하고 짐승처럼 살고 있는 처지를 돕고 싶지 않은가. 선교라는 이름으로 뛰어들어 예수 믿으라고 서두르지 말고 그들의 도움이 되어 사는 친구 수준은 지킬 수 없는가. 팔레스타인 지경으로 가보라. 거기에 가면 기독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많이 있다. 단, 저들을 당장 기독교로 바꾸겠다는 욕심내지 말고 오래 기다리든지 아니면 내가 저들의 편에 서든지 해도 좋다는 겸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실, 아브라함 이후 셈족의 투쟁사(?)를 보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면서도 `선민'이라는 것의 이해가 너무나 세속적 또는 사전적 지식에 머물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자비로우신 하나님 `선택'이란 선택 이후 까지를 생각하는 너그러운 아량이 있어야 한다. 메시아를 얻기까지의 방법론이다. 정결한 처녀가 선택이요, 또한 동정녀가 선택이다. 선택 이후는 그 아들이 베푸는 인류 모두를 향한 사랑이다. 메시아의 꿈과 이상을 펴가는 날에도 구약식 선민의식에 빠져 있으면 그것은 `이스라엘' 닮은 과오가 된다. 기독교까지 이스라엘식 형식에 매달려 있다면 메시아의 날은 꿈의 날이 될 뿐 더는 없다. 기독교를 왜소한 종교, 민족이나 선민의식에 머무는 초등종교 수준에 멈추게 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너그러운 아량을 생각해 본다. 기독교여, 마음을 열라. 팔레스타인의 눈물을 너의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씻어 주며, 또 그들의 상처를 너희가 약을 구하여 치료해 주면 어떻겠나.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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