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새벽 부활절 연합예배 때 설교할 사람을 아직까지 정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교회들이 참석하면서 어느 교단의 누가 순서에 맞는 역할을 할 것인가를 정하는 데 서로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쉽게 `적당한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그런 모양이다. 이러할 때는 언제나 꼭 맞는 사람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타협으로 적당한 사람이 정해지는 정치가 결과를 결정한다.

누가 설교하고, 누가 기도하며, 누가 사회하는 것이 부활과 무슨 상관일까? 얼마나 사람이 모이고, 무슨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것인가 역시 부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오늘의 부활체험은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죽는 것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교회의 죽음운동 즉 예수살이 운동이 제대로 일어나는 곳에 부활체험은 있을 것이다.

예수는 죽어서 부활한 것이 아니다. 역사의 예수가 부활하였다는 주장 역시 중요하지 않다. 부활은 단순히 제자들의 부활체험의 사건이었다. 예수가 부활하였다거나 아니라거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부활체험이 중요하단 말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예수의 삶을 전제로 한다. 그의 삶은 끊임없는 죽음이었다. 그가 사는 것은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요, 죽음 그 자체였다. 세상권력에 죽었고, 재력에 죽었으며, 세상의 영광과 명예에 죽었다. 그래서 그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영원히 사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와 같이 죽음으로 사는 삶이 그에게 없었다면 죽은 뒤에 오는 부활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죽음으로 사는 삶이요, 삶에서 죽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이나 기독교회는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고 아등바등 구차하게 살려고 한다면 죽음의 체험이나 부활의 체험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와 기독인들이 무엇을 살고 죽으란 말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 없이 `역사의 예수'의 삶이다. 물론 역사의 예수의 삶이 어떠하였다는 것에 대한 논란은 많다. 그러나 역사의 예수의 삶을 따라가는 길을 찾는 것은 별로 어렵지가 않다. 그것을 사는 것이 쉽지 않을 뿐이다. 이렇다거나 저렇다고 따지는 것은 그것을 살피고 따지는 사람의 몫으로 돌릴 일이다. 그 대신 그를 `믿는 사람들'은 그냥 `그를 사는 것'이 남아 있을 뿐이다. 예수가 부활하고, 어떤 놀라운 일을 하였다는 것이 기적이 아니다. 예수 자신이 곧 기적이다. 그가 그리스도가 되었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기적이다. 그것은 바로 `역사의 예수' 자신이 증거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나 교회는 어떤 기적을 바라보고 기다릴 것이 아니라, 그냥 단순하게 역사의 예수를 사는 것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들의 삶이 증거한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듯이 예수가 살아 있던 당시의 제자들, 예수가 죽기 이전의 제자들은 아주 평범하고 별로 감동을 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체험이 없었다. 그냥 예수가 좋아서 따라다니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는 결코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예수가 무기력하게 죽은 뒤에 기대하였던 무엇 중에서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제자들은 그래서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오늘의 교회들이나 기독인들은 바로 죽기 전의 예수를 따라다니던 무리들은 아닐까?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바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뒤라야 했다. 그 뒤의 삶은 그 전 삶과는 완연히 달랐다.

그래서 오늘 우리 교회들은 죽음을 경험하여야 한다는 말이다. 조직을 죽여라. 명예를 죽여라. 교회권력을 죽여라. 교회재력을 죽여라. 교회정치를 죽여라. 기준화된 교리와 신조와 그에 맞춘 삶의 양태를 죽여라. 그 대신 `역사의 예수'를 살라. 그를 `믿는다' 하지 말고, `예수를 한다' 또는 `예수를 산다'고 말하라. 제자들이 살았던 부활체험 이후의 삶은 바로 `역사의 예수'가 살아서 살아갔던 그 길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가 죽으면서 동시에 죽었다. 자신들의 미래가 암담하게 죽어버렸다. 절망만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예수의 부활이 거대한 사건으로 체험되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부활을 말하고 기념하기 전에 죽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예수가 지금 교회를 볼 때 기뻐할까? 일반 사람들이 교회를 기뻐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더욱 더 기뻐할 리 없다. 오늘 교회를 외면하는 우리 사회의 소리를 제대로 듣는 것이 곧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예수도 살았을 당시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비난을 받았다'는 말로 교회를 배척하고 싫어하는 현대인들이 잘못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 대신 `역사의 예수'의 삶을 오늘의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이 살고 있지 못하고 있구나 회개하라. 그러할 때 약간의 부활체험이 가능하지 않을까? 내가 죽지 않고 예수의 부활을 경험하는 법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번 부활절은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의 죽음운동으로 내용이 채워졌으면 좋겠다.
 
김조년(한남대학교 교수)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