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수철을 잔뜩 구부렸다가 놓았을 때 순식간에 원래의 제 모습으로 돌아가듯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꿈에 들은 소리 때문이다. 잠을 깨면 새벽기도를 준비하느라 시간을 확인하게 되는데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25분이다. 도저히 그대로 다시 자리에 누울 수가 없어 일어나 옷을 입고 옥상에 올랐다. 흰색 네온으로 만들어 높이 달아놓은 십자가를 보며 오랜 시간을 자리에 앉아 추위를 느끼고서야 일어났다.

꿈 이야기를 하자.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은데 내가 매우 귀하게 여기는 것을 내 눈앞에서 가져가고 있기에 몹시 화가 나 발로 찼다. 아주 힘껏 찼다. 나에게 발에 차인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차기는 내가 찼는데 옆구리를 발에 차인 그 놈이 남이 아니라 나였다. 바로 그 때이다. 내 밖에서 들리는 소리인지 내 안에서 솟아난 소리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목사질을 하며 한평생 살고 있는 나를 분해시키는 내 안에서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네 친구인 000 목사는 죽음으로 그의 목회를 마쳤는데 너는 어떻게 죽을래?' 하는 것이다.

꿈속의 소리에서 내가 들은 의미는 목사직을 수행하는 네 놈의 죽음이 참으로 목사답게 되도록 목회를 수행하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화두로 보름 남짓 지난 어느 날, 가까이 속을 트고 40년을 지내는 목사에게 꿈 이야기 했다. 나의 꿈 이야기를 다 듣고 답하기를 “허 목사, 하나님은 아직도 허 목사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먼! 그 꿈이 내 것이 돼야 하는데” 하며 그날 여러 시간을 같이 있었다.

죽음도 삶이다. 세상의 삶을 마치는 죽음은 그 사람의 삶이다. 추기경의 죽음은 추기경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삶이며, 목사의 죽음은 목사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삶이며, 대통령의 죽음은 대통령의 세상에서의 마지막 삶이다.

모든 사람의 죽음은 바로 그 사람의 세상살이의 마지막으로 살아가는 삶인 것이다. 죽음으로 들어가는 데는 모든 생명에 차이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를 묻는다면 그 답은 다양할 것이다. 그러기에 죽음의 소리를 산 자는 들어야 하고 죽음을 향한 산 자들의 소리를 죽은 자는 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부모님의 장례를 마치고 따르겠습니다 했을 때,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셨다(마 8:22). 부모님을 향한 자식의 예를 어겨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살아있는 자로 살아가라는 결단의 재촉이다.

죽은 자의 소리를 산 자들은 욕심 없는 마음으로 들어야 하겠다. 이제 어떻게 듣고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는 산 자의 책임이요 또한 살았다는 사람들의 삶이 될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이 그 죽음의 말을 바로 듣지 못하거나 각자의 형편에 따라 그 의미를 왜곡하거나 이용한다면 죽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죽은 자의 말을 버리는 것이 되고 결국 죽은 자로 두 번 죽게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너는 어떻게 죽을래? 아니 너는 죽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사랑이며 자유와 정의와 평화와 평등이며 민주주의와 생명이 생명으로 대접 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인가? 종교와 교단과 교리와 신학과 교회건물과 교인숫자와 목사라는 직책과 000장이 되는 것인가? 명함의 칸과 줄을 더 넣기 위한 명예인가? 잘 하십시다. 000인 체 하지 말고 000답게 살아갑시다. 너무 거창해서 감당하기에 크다면, 한 끼 끼니를 먹더라도 부끄러움이 없다면 너야말로 큰 사람일 것이다. 그 한 끼니를 나눌 수 있도록 애쓰고 실천했다면 너는 참으로 큰 자요 네가 종교이며 네가 바로 신앙이다. 살아있기에 바로 죽자. 죽을 것이기에 바로 살자 이것이 땅에 있는 하늘이요 땅에 사는 하늘 사람이다. 그래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
 
허광섭 목사(창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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