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10월31일 루터는 오랜 영적 방황 끝에 하나님의 의(義)의 참뜻을 깨달아 비덴베르그 교회 정문에 성직자로서 자신의 견해 95개 조문을 써 붙임으로 종교개혁의 불을 지폈다. 그 조항은 교회가 행하는 교황무오설, 면죄부 판매, 재산 선취권, 성경에 계시된 변형된 교리와 신앙의 행위들이 성경과 불일치함에 대한 성명이다. 당시는 천주교가 유일한 기독교이기에 빗나간 신앙 행위에 대하여 반기를 드는 개인이나 단체는 없었다. 루터는 골리앗과 같은 천주교 권능에 하나님 의를 가지고 공격 하였다. 성경의 진리를 앞세운 결과 왜곡된 비 신앙을 바로 잡는데 많은 수의 교회와 성직자들이 개혁에 동참 하여 성경적 진리의 길을 개척했다. 역사가 흘러 21세기 초 한국 교회의 개혁성을 진단하면 오히려 종교개혁 당시의 천주교의 단점들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모습이다. 종교개혁의 정신이 떠난 한국 교회는 교파와 교권이 난무하고, 교회 내의 성직 임명은 자파 세력 확보를 위한 수단이 된지 이미 오래다. 일부 자격을 갖추지 못한 자들에게 일정한 교육도 없이 속성으로 안수를 남발하여 성직을 새로운 직업군으로 전락케 했다. 그리고 제대로 코스를 밟지 않은 자들의 가짜 학위 취득은 교회의 세속화와 신학 교육의 미래에 심각한 문제임이 안타깝다. 일부 부패된 성직자들은 교회 내의 제직 임명 때마다 직분에 상응한 헌금을 강요, 이로 인해 성직이 매매되는 기분을 갖게 하고 거룩한 죄인만 양산함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헌금을 선교와 전도, 그리고 구제를 통한 사회 환원 보다는 교권 화를 위한 재산 축척으로 종교 개혁 당시의 성전 건축 재원 마련을 위한 면죄부 판매를 연상케 한다. 일부 중대형 교회 성도들의 신앙은 구원에 대한 감사한 마음과 섬김의 순전한 모습은 볼 수 없다. 기막힌 사연은 교회운영에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부유층으로 이루어진 고액 십일조 그룹의 등장이다. 어처구니없는 현실은 교회 내의 저소득자들 중 특권층 진입과 신분 상승을 위한 고액 십일조 때문에 수입으로는 감당 할 수 없어 빚을 낸다는 소리는 제 정신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해괴함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상 보다는 교단과 개교회의 이름 그리고 유명 지도자의 이름이 오히려 더 영광을 받는 오늘의 교회는 분명 성경의 계시와는 거리가 멀다. 교인들은 작고 초라한 개척교회 섬김을 피하고 대형 교회 다니는 것을 기호로 삼는 잘못된 교회관은 분명 바로 잡아야 할 공동의 과제다. 심각한 것은 교회의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다. 이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모른체한 결과가 아닌가? 문제는 교회 속에 하나님의 의도, 예수도, 루터도 죽었음이다(?). 교회가 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도자와 성도들이 다 함께 먼저 성서에 계시된 교회, 주님과 사도들이 세운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로의 환원이며, 다음은 인간의 잘못된 신학과 철학을 거둬내고 “성서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 속에 루터의 개혁정신을 살려 내는 길이다. 이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요 곧 하나님의 의를 살리는 길이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살 길임이 분명하다.오수강 목사 / 필운동 그리스도의 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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