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아시아 역사 찾기 ⑥

카슈기르 공항. 사막의 중심지역이라 그런지 주변의 분위기가 우중충 하다. 나를 마중 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나타나지 않아서 내 마음이 불편해서일까, 공중전화 할 곳이 마땅치 않아서 두리번 거리는데 경찰관 한 사람이 내게로 와서 무엇을 도와주랴고 했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나를 마중하기로 했는데 오지 않는다 했더니 전화해 보라면서 자기의 핸드폰을 내게 빌려 주었다.
잠시 후에 만난 친구와 시내로 향했다. 카쉬기르 고대사 박물관부터 찾아갔다. 문 닫을 시간이 다가왔다. 넉넉지 않은 시간이지만 비껴갈 수 없다. `파미르 고원' 답사가 추가되어서 일정이 빠듯하다.
카쉬기르는 파미르 고원을 넘나들던 옛시대의 문명교류의 중심이었다. 특히 인도문명의 중국진출을 향한 중심 통로였다. 혜초가 걸었고, 당나라 현장법사가 걸어갔던 그 길이다. 전성기 타마르칸 사막 주변에는 300여 개 도시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초라한 도시들 몇개가 주변에 남아 있다. 타마르칸 하단으로 뻗은 길을 `서역 진출로'라고 했듯이 불교 문명이 중국으로 가는 주요 통로였다. 물론, 불교만 아니라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나 마니교, 아라비아 이슬람까지 동서문명이 교류 주 통로 타마르칸 사막이다. 나는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찾아나섰다. 고고학 박물관 진열 작품 중에서도 그 흔적을 찾는다. 평범한 관찰법으로는 놓치는 수가 있다. 그들의 시대는 다른 종교들과 함께 움직이면서도 비교적 친하게 지냈다. 요즘은 인심이 사나와져서 타종교 간의 분위기가 대체로 넉넉지 않다. 특히 기독교 사람들의 독선은 늘 튄다. 아쉽다. 그런데 중앙아시아 일대에서는 깜짝 놀랄만한 사례들이 많이 있다. 키르키스탄 수도 비쉬켁 변경 부라나 박물관이나 그 일대에서 발굴한 자료를 보면 네스토리우스파 선교사들과 이슬람들이 사이좋게 지냈던 흔적, 심지어 그들은 중 무덤에까지 같이 간 자료도 있다. 역시 키르키스탄 부라나 박물관에서 12km 쯤 지점에 있는 악베심 유적지 답사 결과 자료에는 네스토리우스 교단 본부 예배당 구조에는 멀리서 온 신자들이 며칠 씩 묵어가는 여사(旅舍) 곁에 별도로 배려한 마니교 선교사들이 그림 그리는 방까지 있었다.
그들의 시대를 알아야 박물관 유물에서 기독교 지료를 찾아내기가 쉽다. 예를 들면 부처님 손 바닥에 그려진 십자가, 마니교 교사들이 입고 있는 옷에 그려진 변형 십자가 연꽃 속에 묻혀 있는 십자가, 세사람이 서로 얽혀있는 조각상을 대할 때는 별도의 비밀이 있다. 예를 들면 이 조각들 중에는 할아버지와 아들과 손자벌 되는 젊은이가 마치 세사람의 형체를 머리통 세개로 구분한 듯한 기형의 작품들이다. 이는 성부^성자^성령을 표기하는 것인데 이로써 그들은 자기 존재를 암시 또는 증거하였다.
중세기 어느 때는 혹독한 핍박을 견디면서 지혜와 기지를 최대한 발휘해야 하는 때가 있었다. 단순 여행기에 역사 설명을 다 담을 수 없지만 페르시아(이란), 이라크, 중앙 아시아, 타마르칸 지역, 즉 중국의 신강(신장) 지역의 역사 현장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은 역사공부를 하고 가야 볼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몇주 전 돈황 박물관 이야기를 쓸 때 클로바 이파리 속에 감추어진 십자가는 나와 함께 했던 일행 중 크리스찬 신문 전용관 부장만 네스토리우스파 십자가를 보았다. 모두 스쳐가버린 뒤 그가 혼자 두리번 거리고 있기에 내가 그에게 선물로 네스토리우스파 십자가 그림(조각)을 소개했었다.
성지를 갈 때, 또는 옛 문명의 현장을 찾았을 때는 반드시 겸허해야 한다. 그리고 구하는 자세, 즉 구도의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카쉬기르 박물관에서 네스토리우스파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시내 서점으로 갔다. 책 속에서 네스토리우스의 힌트를 얻었다. 위구르 철학자들의 자료에서다. 다시 광장으로 갔다. 8세기 이슬람 사원으로 갔다. 중국과 오아시스 지대의 건축법이 혼용된 건물이다. 모스크 본체는 크지 않았다. 이맘이 설교하는 강단 좌우로 공간이 횡으로 길었다. 그러나 문은 활짝 열게 되어 있고 나무 숲이다. 숲이라기 보다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어져 있고 간이 의자가 줄을 맞추어 놓여 있다. 땅 바닥에도 조그마한 돌판들이 놓여 있다. 뙤약볕을 가리기 위한 나무 숲이요, 사람들은 나무 의자가 돌방석 등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앉게 되어 있다. 드넓다. 2만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는 나무 숲 공간에 청중(신자)들이 앉는데 그 뒤로 횡으로 긴 건물이 사원(모스크) 관리실들로 쓰이고 있었다. 이 건물 구조를 다시 설명해 볼까. 한문으로 “二”字 모형이기도 하고 “口”자 형식도 되는데 가운데 공간이 오아시스 지대의 형식조건을 갖춘 예배공간인데 자연속에서 드리는 예배 분위기, 인위적인 냄새를 최소화한 성역으로 여겨진다.
광장으로 나왔다.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광장은 위구르인들의 우범지대였으나 중국정부가 도사를 새롭게 단장하면서 폐쇄 및 철거, 그리고 위구르 인들의 주거지역과 상가지역을 별도로 구획하였다.
그러나 우름치 지역은 중국인과 위구르인들의 비율이 비슷하지만 카쉬기르나 호탄 등 남부지역은 80%이상이 위구르인들이다. 신강성 지역의 위구르 이슬람을 강성으로 볼 수는 없으나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을 해야 한다. 신강성에서 선교활동이 조심스럽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신분관리를 해야 하고 또 이슬람 지역이기에 신경을 써야 하니 쉽지가 않다.
다음 날 12시. 우름치에서 열차로 오는 바나바 선교훈련 팀과 합류, 파미르 행에 나섰다. 30인승 버스. 파미르 고원이 해발 4,300m이기에 자칫 산소부족 현상에 휘말려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몸 상태가 자신이 없다. 3,000m 지점에 오르니 어떤 이는 멀미, 어떤 이는 산소부족으로 쓰러진다. 산소 공급이 필요하다. 파미르 지역 김선교사는 바쁘다. 이리 뛰고 저리 뛴다.
차는 더욱 높은 곳으로 달린다. 3,500m 지점, 휴식을 취하며 나는 몸을 거칠게 움직여 보았다. 몸 상태가 괜찮다. 혹시 젊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망신을 당하면 어쩌나 했는데 견디어 낼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뒷머리가 뚝 하는 듯한 느낌이 왔다. 그리고 머리가 맑아지고 뒷골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고쳐주셨구나!' 지난 3월 11일 오전 11시 몸 흔들림 병을 얻었다. 그러나 3월 하순부터 다섯차례 선교여행을 불완전한 몸 상태로 했으나 지금 고쳐주시는구나. 충격요법이실까. 마치 관절이 골절되었다가 회복될 때 같다고나 할까. 나는 분명히 느낌을 얻었다. 주여 감사합니다. 고원 정상이다. 4,000m 고봉을 지나 차가 숙소에 이르렀을 때는 4,000m 지점, 몸의 상쾌함, 혹시나 산소부족으로 내가 쓰러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했으나 주께서 유쾌함을 주셨다.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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