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의 현주소
 
  기독교 역사 2천여 년이니 세계 기독교는 자기존재를 인정받기 위해서도 지구인 모두의 생활이 `빈곤과 분쟁'만큼은 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능동적 자세를 원한다. 어떤 운명집단의 억압이 아니라 스스로 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자식들'의 권위로 지구인의 안녕을 책임지는 자세여야 한다.
현재 지구상에는 (1)중동지역 분쟁이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영토분쟁이다. (2)서남아시아 분쟁이 있다. 며칠 전까지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버마(미얀마) 군부독재와 아웅산 수지를 중심으로한 민주세력간의 투쟁이 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아프가니스탄의 참담한 현실을 한국교회는 지난 `샘물교회 선교단 피랍사건' 당사자이기에 뼈아프게 알고있다. (3)동아시아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북한지역은 부끄럽게도 최하위 인권국가로서 세계인의 지적을 받고 있다. 특히 핵무기 보유 욕심 때문에 미국의 견제를 받고 있으며, 북한의 빈곤이나 갈등(인권문제)은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의 더욱 간절한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중국의 티베트 문제, 대만(타이완) 문제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 중국과 타이완(대만) 관계도 결코 하나의 중국일 수 없으면서도, 중국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 앞에서도 떨고 있다. 일본과 중국, 일본의 북방영토 반환문제는 러시아와의 문제이고 오키나와 인근의 신카쿠 섬 등은 중국과도 피하지 못할 시비가 남아있다.
그리고 대한민국과 조선인민공화국의 통일시대 또한 난감하고 난처한 과정이 남아 있다. 쉽지 않은 통일대한의 시대는 동북아 정세와 함께 미국 러시아 일본 중국의 4강국의 입맛과도 상관이 있다.
유럽으로 가볼까? 유럽의 화약고라고 했던대로 오늘 이시간도 마치 잠시 쉬고 있는 휴화산 동유럽의 코소보, 북아일랜드,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분쟁을 들 수 있다. 특히 발칸반도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분쟁, 코소보의 문제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세계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이들 모두 해체 이전의 유고슬라비아 영토인들인데, 이들 중 코소보는 중세기부터 수난과 저주가 있었던 지역이다.
코소보 분쟁은 알바니아계 주민이 90%를 이루는데, 코소보는 그들을 제외한 세르비아계 주민 10%와의 갈등 때문에 해결하지 못하는 비극의 지역이다. 이들은 로마 가톨릭, 세르비아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이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순수 기독교인데 기독교까지도 연합할 수 없어서 분쟁은 장기화 하고 있다.
코소보의 세르비아(정교 기독교)는 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알바니아계 주민들에게 대세를 넘기지 못하고 있는데, 그것은 코소보 지역이 그들 민족의 발상지이자 성지이기 때문이다. 코소보는 12세기에 탄생한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중심지이며 정교회(동방 그리스도 교회)가 세워진 성지이다. 14세기 후반 세르비아는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오스만 군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역사적인 패배를 겪은 `1389년 코소보 전투'는 유명하다. 그때 세르비아계 코소보인들은 민족 구성원 모두가 마지막 한사람까지라는 전설을 남길만큼 용맹스럽게 저항했다. 그때 오스만 술탄은 콘스탄티노플 동로마 황제를 휘하의 장수로 이끌고 올만큼 동로마 제국이 오스만의 이슬람에게 무너지고 있던 때였다. 그때 세르비아는 기독교의 자존심들까지를 포함해서 싸웠다. 그들은 그때 비록 전투에서는 졌으나 기독교의 명예를 지켜내기 위한 `영광스러운 패배'였다고 지금까지도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슬람 신앙으로 똘똘 뭉친 절대 다수의 알바니아계 앞에 승복을 못하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의 현주소북아일랜드는 차츰 가닥을 잡아간다고 해도 러시아로부터 완전독립을 원하는 체첸 공화국 또한 고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체첸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카프카스 산맥 북쪽 지방에 위치해 있다. 이슬람 신앙으로 단련된 체첸인들은 1864년 러시아에 병합되었다.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지대인 체첸의 영토는 러시아의 국경관리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시 체첸 민족이 독일군에 협력했다고 트집을 잡은 스탈린에게 미움을 산 그들은 별도 관리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체첸인들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진 뒤 독립을 원했다. 러시아에 병합되거나 그들의 연방이 되고 싶지 않았다.
체첸의 자존심을 꺾기 위하여 러시아는 1994년 12월 체첸을 침공했다. 그러나 체첸의 배후는 아프가니스탄 등 이슬람 무장세력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무자헤딘 세력의 엄호를 받으며, 강력하게 저항했다.
더구나 1991년 체첸의 영웅 두다예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체첸의 결속을 강화, 러시아에 대항했다. 그러나 1996년 4월 두다예프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전투 중 사망하면서 양측의 타협안이 나오는 듯 했으나 쉽지가 않다. 앞서 말한대로 체첸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체첸 분쟁에는 흑해의 카스피해가 연결되어 있어 석유 분쟁이 내면에 깔려 있기도 하다.
인류의 오늘, 끝없이 이어지는 분쟁은 스페인의 바스크 분쟁도 있다. 스페인 바스크인들은 기원 전부터 스페인과 별도로 강한 독립심을 가진 민족집단이다.
다음은 아프리카 지역이다. 르완다, 소말리아 등 쉽지 않은 분쟁지역이다. 끝으로 아메리카에도 문제지역이 있다. 쿠바는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페루나 콜롬비아 등 또한 완전지대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세계가 민족간의 차별과 종교들의 시비에 휘말려서 고통 당하고 있다. 특히 중동문제는 기독교와 이슬람, 인도^파키스탄은 힌두와 이슬람, 또 하나 세계사의 골치덩이로 떠오른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세력 또한 쉽게 다루기에는 벅찬 상대들이다.
조심스럽게 말해야 할지, 아니면 크게 고발해야 할지 판단이 쉽게 서지 않지만 오늘의 세계분쟁 한 복판에는 기독교가 원인제공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설프게, 세계인의 구원자를 자처하면서도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분쟁(문제)만 일으키는 당사자가 되었다면 크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2008년 세계사의 분쟁현장을 고발하면서 치유해 가는 속죄와 용서의 제단을 만들고 싶다.
 
카인의 칼을 부끄럽게 하라

파키스탄 전 총리 베나지르 부토 피살
 
지난 12월 27일 베나지르 부토 전 파키스탄 총리가 선거유세장에서 피살되었다. 이어지는 자살 폭탄 테러로 인하여 20여명의 생명이 죽어갔다.
파키스탄은 이미 총선을 2월로 연기했으나 부토의 살해 당시 파키스탄은 1월 8일로 다가선 총선거의 숨가쁜 날들이었다. 부토 전 총리는 피살 하루 전 아프카니스탄 국경도시 폐사와르에서 열린 파키스탄 인민당(PPP) 유세에 참석했다. 자살폭탄 테러가 예고된 데다 군중의 수 역시 부토가 나서는 집회 치고는 작은 규모였다.
그러나 부토는 파키스탄의 앞날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분은 내 형제입니다'라고 거듭 거듭 외치면서 건강하고 힘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테러 따위의 위협에는 전혀 두려워하 지 않는 당당한 모습으로 `나는 자살 폭탄 테러나 그 어떤 테러도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제 내 정치는 어떤 어려움과 위험이 가로 막더라도 여러분과 함께 하기로 이미 맹세했다'고 선언했다.
부토 파키스탄 전 총리는 누가 죽였나? 1999년 쿠데타로 집권한 무샤라프 대통령이 드디어 군복을 벗고 민주제도에 걸맞는 총선을 치루고 정국을 평화체제로 이끌어 보고자 했으나 그게 쉽지 않게 되었다. 무샤라프의 권력행진의 현장에 부토 전 총리의 등장은 엄청난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죽였을까? 물론 살아있어도 무샤라프에게는 버거운 상대인데 그녀는 이미 그 목숨을 파키스탄의 앞날을 위해 던져버린 모습으로 살았고 그리고 그의 피를 파키스탄의 정치 현재에 뿌리고 갔다. 그가 떠난 뒤 그의 유서가 공개되었는데 그는 그의 정치기반을 열아홉살짜리 학생인 아들에게 넘겨주고 있었다.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는 1970년대 군복구테타로 실각, 그리고 처형된 줄피가르 알리 부토의 딸이다. 알리 부토는 파키스탄의 영웅이었다. 대통령 총리를 거치는 등 파키스탄의 자존심이었던 그가 정적에게 처형되었는데, 이제는 그의 딸 베나지르 부토 전 총리까지 피살된 것이다.
1988년 파키스탄 인민당(PPP)을 이끌고 총선 승리로 이슬람 국가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으나 1990년 굴람 이샤크 대통령으로부터 부패한 족벌주의라는 이름으로 해임되기도 하였으나, 1993년 다시 PPP를 이끌고 총선거에서 승리, 총리에 복귀했었다. 그러나 다시 부패할 정치인이라는 이유로 두번째 실각하자, 1999년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2007년 10월 귀국하여, 세번째 총선승리를 눈앞에 두고 가던 길을 멈춰야 했다.
 
■마하트마 간디의 피살과 부토의 죽음
 
1948년 1월 30일, 인도의 성자요 정치가인 마하트마 간디가 힌두교 열심당 청년 고드세가 쏜 총알 세 방에 쓰러졌다. 첫발은 간디의 복부를 뚫고 등 뒤로 나갔다. 둘째 총알은 갈빗대 사이를 통과해 등 뒤로 날라갔다. 세번째 총알은 젖꼭지 윗부분을 통과해 폐에 박혔다. 최후의 순간, 그의 오후 5시 예배시간 함께 하는 이들 수백명이 지켜보는 시간에 그는 신의 이름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20세기 최고의 인물이다. 그는 1869년에 태어났으니 78세에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그해 1월 13일, 그는 최후의 단식이자 가장 위대한 단식을 시작했었다.
그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인도 독립을 성취해낸 제1의 지도자였다. 바늘침 만큼한 무기 하나 없는 맨손, 비폭력의 정신으로 영국으로부터 인도를 되찾았다. 그러나 일찍이 무굴제국의 이슬람 시대 이후 힌두 인도의 동반자가 되어버린 이슬람이 분할독립을 요구하자, 백방으로 이를 막아내려고 애썼으나 실패했다.
간디가 마지막 단식을 하고 있는 1월 13일 그의 단식목표는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나뉘어지기는 했으나 비록 종교 때문에 나라가 분할되는 수치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해도 `폭력행위중단'의 요구였다.
간디의 단식은 그가 사용하는 최고 최선의 투쟁 무기였다. 단식에 들어간 그 순간부터 간디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몸무게가 줄고, 물은 마시면 토했고, 신장기능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3일째 되는 날부터 그는 그의 비를라 하우스 현관에 있는 간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는 마치 태아처럼 무릎을 몸에 바짝 끌어당기고 흰 카디로 얼굴을 제외한 전신을 휘감은 채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듯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순례자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의 요구사항 중 인도가 분리 이전의 자산 중에서 파키스탄(자치령)에게 주기로한 재산 5억 5천만 루피를 즉각 지불하라는 요구도 있었다. 간디의 단식의 시간이 4일째 되던 날 인도는 그들을 지불해야 했다. 18일에는 간디의 몸에서 더 이상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들은 무조건 간디의 요구에 따르기로 했다. 네루는 물론 인도정치인들, 파키스탄 지도자들, 경찰, 힌두교도, 무슬림, 시크, 기독교, 유대교 등의 대표들도 간디의 비를라 하우스 단식장에 와 있었다. 힌두 인도의 나라에서 상대적 약자인 이슬람 교도들을 완전한 자유인으로 살게 해달라는 것이 간디 단식의 가장 큰 몫이었다.
인도는 무조건 간디의 요구에 항복했다. 그러나 간디는 한번 더 다짐했다. 힌두와 무슬림의 열성분자들이 서로에 대한 대량학살을 준비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약속을 할 수 있는가? 무슬림들이여, (나) 간디가 파키스탄 방문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간디는 그의 입속에서만 구르고 있는 말로 다짐과 서약을 요구했다.
간디의 요구는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의 단식이 끝난 19일부터 단식효과는 무력해졌다. 그리고 20일 날 간디의 집 정원에 사제 폭탄이 떨어졌다. 무서운 폭발음이었다.
간디의 제자들은 경비를 강화하고, 특히 예배시간 참석자들의 몸수색을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찌 하나님 앞에 함께 예배하는 자들끼리 의심할 수 있느냐'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는 30일날 죽여없애야 되는 이슬람을 왜 그토록 옹호하느냐는 듯 열심 힌두청년의 총에 맞아 죽었다.
간디 피살직후 자와할랄 네루 인도 수상은 인도와 세계를 향해 간디의 죽음을 발표했다. `우리의 삶에서 빛이 사라졌습니다. 사방에는 어둠뿐입니다.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지도자, 우리의 바푸 우리나라의 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인도, 간디 시절의 인도는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까지 포함하여 `오직 인도'였다. 간디는 영국의 식민지 상태인 그의 조국을 광복시켰으나 종교를 이유로 나라가 쪼개지게 되자 부끄러웠다. 그러나 현실은 그의 요구를 배반했다. 그래도 간디는 분할 독립해 간 파키스탄과 그들의 이슬람을 위해서 최선의 배려를 하는 과정에서 그의 동족 힌두의 청년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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