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예수 지식에서 벗어나자

 네 눈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티를 빼라 하느냐. 외식하는 자여, 거짓 선지자여! 외식하는 자와 거짓 선지자의 간격은 얼마나한 거리에 있을까? 위선자에서 거짓 선지자로 발전할 수 있을까?
 믿는 자의 위선을 말씀하시다가 거짓 선지자로 말씀이 옮겨가는 뜻은 거짓과 위선의 거리가 멀지 않음을 암시 하심이라 할 수 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이 있다. 처음에는 얼마간의 눈속임으로 하다가 재미를 붙이면 큰도둑이 되듯이 눈속임이 거짓으로 자리 잡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왜 위선일까? 어떤 모습이 위선자의 거짓일까? `거짓 위(僞)'자가 말하고 있듯이 위선은 거짓이다. 참이 아니다. 진실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다가 도중에 멈춤이 장차 위선의 씨앗이 될까? 위선자 교훈과 거짓 선지자(마 7:5, 7:15) 사이에 기도를 부탁하는 말씀이 있다(마 7:7∼8).
 위선의 단계에서는 쉽게 돌이킬 수도 있으나 거짓으로 자리잡으면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외식과 위선이다. 겉치장이 질병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단 한마디 거짓말도 용서하지 않으시려는 예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거짓이나 위선은 나약함이나 불확실한 지식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불확실한 예수지식을 서둘러 발전시켜야 한다. 사람들은 예수를 쉽게 생각한다. 믿기만 하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느니라. 이 말씀을 맹목적인 방법으로 접근하려는데서 기독교인들의 어려움이 시작된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럼 가장 쉬운 인생사를 하나 떠올려 보자. 남녀가 결혼을 한다. 아주 쉬운 일이다. 서로 결혼을 약속하고 친지들을 하객으로 초청하고 혼인식을 하면 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하기까지 그들은 각각의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수고와 성장과 교육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결혼을 한다. 그리고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니 성격을 조심스럽게 맞추면서 살아가야 한다.
 너무 쉬운가?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는다, 에도 믿음의 단계까지 인간은 각기 성장한다. 그리고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 는 로마서 1장 17절의 바울이 3차 전도여행지 고린도에서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편지하는 내용이니 그의 나이 50살이 넘은 AD 53년에서 57년 무렵의 글이며, 이는 분명히 의인(義人)이라 하여 수준 높은 어느 단계에서의 이해요 터득의 경지가 된다.
 교회가 신자를 가르칠 때 무조건 성경에 써 있다고 해서 아무나 붙잡고 억지로 입을 열게 하고 자루에 곡식을 퍼 담듯이 하려 드는데 그들은 사물의 이치(세상의 이치)를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뜻이 무엇인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예수가 나의 생명의 구원자 이심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럼 여기에서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지식의 확보가 중요하다.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하기에 사람들은 그 앞에서 `위선'을 떨며 `거짓'을 행하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本體)시며 그 모든 것이다. 그에게는 하나님으로서의 권능과 품격이 있어서 한 점 모자람이 없는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러할진데, 이 모습의 예수를 인간이 확실히 알았다면 그 앞에서 어떻게 거짓과 위선을 행할 수 있겠는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리고 `의인의 믿음, 곧 믿음'이라는 말의 발생은 그분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가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그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이요, 그가 또 죽은지 사흘 안에 부활하셨으니 그의 부활이 나의 부활임을 믿는 바로 그 행위를 믿음이라 한다.
 이 믿음은 양심과 그 자신의 품격 모두를 걸고 지켜야 하는 법칙인 것이다. 이러한 믿음의 단계에서 `의인' 또는 `구원'이 성취된다. 이같은 과정을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그에 따르는 성취의 수고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봄이 되어 채소 밭에 배추 상추 씨앗을 뿌려도 아침 일찍 이슬받이를 감수하면서 밭에 나아가서 흙을 골라 주고 벌레도 잡아주어야 싱싱한 채소를 한 달쯤 이후에 맛보게 된다. 하물며 예수를 배우고 믿어 그의 생명에 참여하고 영생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하나님의 선물이, 꿈에 떡 얻어 먹는 식으로 가능하겠는가.
 신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으로 뻔뻔하고 가련한 도둑들이 많이 뒤섞여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아휴, 저런, 저런 도둑이라니…. 그러나 어찌하는가. 잘못 길들여진 (특히) 한국의 신자들을 다시 공부(교육)시키는 수밖에.
 7장 7절을 보라.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였다. 이는 예수님의 육성이다.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친히 하신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예수의 이 말씀은 헬라어 신약 성경의 내용과는 달리 아랍어나 히브리어의 말씀이라 생각된다. 예수님은 아랍어와 히브리어를 같이 사용하셨으리라 믿을 때 우리는 히브리어는 시간을 말해 주는 시제(Feuse)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히브리어에는 완료와 미완료로 구분하는 두개의 시제만 있다. 미래시제로 말씀하였어도 완료상황이 끝났으면 완료로 해석하고, 완료시제라해도 당사자가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미완료 상황이다.
 구하라…, 는 마태복음 7장 7절에 대한 어떤 해석자는 본문의 시제는 영원한 진행이라고 말하여 연약한 신자를 위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구할 때까지 계속하여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는 미래시제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으로 기도하고 있는 시간까지는 유예의 시간이 되어 구원의 끈을 붙잡은 셈이라는 것.
 그러나 구하라! 지시형의 말씀을 명령문으로 구분하여 우리는 주 예수의 말씀 앞에서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어야 한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는 명령이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 지리라(막 11:24)하신 말씀의 도움을 받아 신자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
 바로 이같은 환경에서 `위선'의 귀신 또 `거짓'의 귀신이 가까이 접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거짓이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무엇이 위선이요 거짓인 줄 이제 알았으니 저를 대적하라.
 그러나 여기서 거짓 선지자를 말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매우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그 열매로 그들을 안다, 하여 속단을 피해 줄 것을 요구하신다.
 혹시 거짓이 아니고 참일지 모른다 하여 지켜보다가 거짓 선지자의 밥이 되는 수가 있으니 모두들 두려워 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 열매 맺을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그들의 함정에 빠질 수도 있을 것 아닌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다음 말씀과 만나게 된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27)라 하고 있다.
 이로써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이른바 산상수훈이 끝나는데 은혜의 말씀은 어느덧 심판의 시간을 끝으로 마무리 짓고 있다. 반석 위에서, 라 하신다. 반석 위에 지은 집을 주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를 붙잡고 고난과 죽음의 메시아를 말씀하실 때도 반석(<&34535><&34584><&34666><&34661><&34760>)이라 하여 교회는 반석임을 밝히신다. 어찌 교회 뿐인가, 교회구성의 주 요소인 신자 개개인이 반석임을 예수는 밝히고 계신다.
 반석이 아니면 그 위에 짓는 집(모든 세상에서 이루고 있는 일 등)을 보존할 수 없다. 비가 오고 홍수가 나거나 지진이 오면 다 무너지고 만다.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이스탄불에 가면 아야소피아, 곧 소피아 예배당이 있다. 그 예배당은 AD 550년 경 유스티니안 황제시대의 작품인데 그동안 수많은 지진과 재난을 겪었는데도 아직도 건재하다. 어느 부분은 지진에 약간 지각이 흔들렸음을 알리는 표시는 있으나 그 예배당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건재하라! 무너지지 마라! 예수의 신자들아, 반석 위에 지은 집들이여.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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