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보훈의 긴 이야기를 마가는 힘겹게 침묵했고, 누가만 자기식으로 몇 줄 적고 있는 공관복음에서의 예수의 산상보훈은 어찌 생각하면 미스테리로 볼 수도 있다. 왜, 그랬을까? 4복음서 중 유일하게 마태가 산상보훈을 3장이나 지면을 할애하였을 뿐 나머지 제자들은 마태에게 일임한 것인양 뒷짐을 지고만 있다. 이같은 현실을 필자는 미스테리 일 수 있다 했는데 이는 어떤 증거가 특별히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감이다. 제 육감이라고 하고 영감이랄 수도 있다.
 당시 제자들 사이에 예수의 어록을 정리하면서 예수와 함께 하던 날들로 부터 20여 년 지난 터라 그들의 환경이 바뀌고 민심도 많이 흔들렸을 것이다.
 제자들 중 사도 바울이 뛰어들면서 그의 `믿음의 신학'이 전체 분위기를 지배하면서 율법에 대한 일방적인 평가를 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15장 사도회의가 이방선교에 대한 `약식율법안'을 허락하면서 유대파 기독교인들은 위축이 되었다. 심지어 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베드로 마저 사도행전 16장부터는 이름 석자도 사라져 버린 추세가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도회의 결정이 있었던 그 무렵에 마가복음이 탄생한다. 마가복음을 비롯한 4복음서 저자 모두가 예수의 복음을 헬라어로 기록한 것 마저도 우리는 이를 무심코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왜, 제자들 중 예수께서 직접 사용하셨고 다수의 제자들 다 사용했을 뿐 아니라 따르는 자들 다수가 아람어나 히브리어를 사용하였을 터인 데 아람어나 히브리어로 기록한 복음서가 한권도 없다는 것이 기독교의 한계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비교해 보면 그 정서는 물론 각기 민족문화의 깊이를 별도로 가지고 있기에 표현법은 물론 그 해석에 있어서도 차이점이 있었을 것이다.
 아무런 불편이 없이 마태복음에 집중되어 있는 산상보훈이 마가는 거의 묵살해 버린 부분을 별도의 시간을 이용하여 공부해야 하겠다.
 이 시간, 우리는 나병환자를 고치시고 이어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예수와 만난다. 이 부분은 마태와 누가도 각각 기록을 남기고 있다(마 8:1∼4, 9:1∼8), (눅 5:12∼16, 5:17∼26).
 마가는 한 문둥병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였다고 적고 있다. 마태와 누가도 거의 비슷하다.
 문둥병자의 마음 자세가 간절하고 예수에 대한 신뢰와 예의가 분명했다. `원하시면…'이라고 하였다. 신뢰의 표현이다. 그는 `꿇어 엎드리어 간구하여…'의 시간 안에 있다.
 병든 자 특히 문둥병이란 그 시대에는 하늘이 내린 저주로 보았으며 또 한 번 그 병에 잡히면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저주스러운 형벌이었다. 사람들과 함께 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가족과도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인생이었다.
 그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예수에게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 발 앞에 엎드려 간구하는 모습을 보라. `원하시면…'이라는 말 한마디 외에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모습을 바라보시는 예수 마음은 `민망'이었다.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셨다. 그 문둥이의 상처 부위에 손을 대셨을까? 그의 머리에 손을 얹으셨을까? 예수의 마음은 민망일 뿐이었다. 저 문둥이의 소원을 들어 응답하실 수 있으신 것이다.
 문둥병이 그에게서 떠나갔다. 바로 그때 예수는 그에게 엄히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로 삼으라' 하셨다.
 모세에게 명한 말씀은 레위기 14장 2절 이하 9절까지이다. 앞서도 말했거니와 모세의 법이 워낙 엄중하여 구약시대의 사람들도 지켜가기에 벅찼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문둥병을 치료해 주신 후에 그를 제사장에게 보내신다. 예수님은 왜, 그에게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 하셨을까? 오늘의 교회들 중에 병치료의 은사가 나타나면 그 사실을 많은 사람에게 소문을 낸다. 예수님의 방법과는 다르다. 오늘은 병고침 받은 사실을 널리 선전하고 예수는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엄히 경계하신 뜻은 무엇일까.
 병든 자를 치료하는 일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싫어서였을까? 아닐 것이다. 주님은 치료하신다. 치료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치료하기 위하여 오셨다.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주님은 인간 질고(疾苦)를 아시며,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이라 하였다.
 이사야의 마음으로 병든자를 볼 때 누군들 치료해 주고 싶지 않겠는가. 마가복음 16장 17절 이하에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잡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의 마음이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내쫓는 예수를 단순히 치료사로 보아 넘길 위험과 함께 병자가 치료 받은 후 처신에 대한 우려를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달리 말하면 병자가 치료후에도 자기 반성의 시간이 필요함을 암시하셨을 수 있다.
 오늘의 교회 현실에서도 병자 치료를 통해서 금전수수문제, 병 치료 받은 자나 치료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인격에 우려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병 치료나 귀신을 쫓는 등의 행위가 특정인에게 주는 특별은혜로 생각하거나 또 병 고침 받은 사람이 자기는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우쭐대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예수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문둥병에서 치료 받은 자는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예수는 `한적한 곳'으로 떠나실 수 밖에 없었다.
 예수의 모습을 보라. 한적한 곳으로 떠나셨다. 더 많은 기도가 필요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온전히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하는 것이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과정에서 누가는 `병을 고치시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시더라'(눅 5:17)하여 병고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기록 또한 마가와 함께 마태와 누가도 동시에 기록을 하고 있다. 마가는 `수일 후에'라고 하여 문둥병자가 예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소문을 크게 내는 행위에 대한 보상을 예수는 그가 친히 한적한 곳으로 가서 겸허한 기도, 준비를 더욱 할 줄 아는 모습을 보여 주셨다. 제발 예수의 품격 가까이로 가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목회자나 전도자가 많았으면 좋겠다.
병든 자를 고치시다

 수일 후에 가버나움에 들르신 예수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 중, 참으로 감격의 순간을 맞이 하신다.
 생명의 치료. 진실로 고침을 받고 싶은 것이다. 절규다. 병든 친구를 떼매고 온 친구들이 예수가 계시는 집 지붕을 뜯어내고 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천정에서 내려온 환자, 혼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중풍병자, 저는 출입이 자유롭다 해도 혼자서 예수 앞에 오기가 쉽지 않을 사람이다.
 중풍병자를 향하여 예수 말씀하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을 트집 잡는 사람들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신다.
 말이 쉬우냐? 나타나는 증거가 쉬우냐? 말로 된다면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주님은 권능이시다.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문둥이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셨다.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예수는 기적으로 실패하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의 뜻을 알겠으나 예수의 병고치는 기적과 문둥이를 깨끗케 하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시는 능력은 곧 십자가의 능력이시다. 예수는 이 세상에 오신 그 순간부터가 십자가의 형극과 같은 시련을 감수하셨기에 세상에 오신 후 예수의 모든 행위는 십자가에서 나오고 있다.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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