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예수의 사람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때에 그의 주변에 병든 자가 얼마나 많았던가에 대한 셈을 해 보면 예수활동의 거의 모두가 병자치료에 있음을 볼 수 있다.
병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이에 대한 토론과 시비가 많다. 어느 시대에나 있었으며, 오늘의 한국교회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병자의 치료 문제와 교리시비, 더 나아가서 병 치료에 열성을 보이는 목회자들이나 전도자들 중 이단정죄를 받는 자들이 더러 있다.
50년대 한국의 대표적 두 이단그룹이 있었는데 통일교와 박태선의 전도관이었다. 그런데 통일교에서는 병 치료를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도관 박태선은 병자치료에 열을 올렸었다. 심지어 그가 안수한 물은 치료약이 되고 축복의 분량이 되기도 했었다. 그래서 흘러 다니던 말 중에는 박태선이 세수한 물, 심지어 가래침을 뱉은 물도 특효가 있다고 야단법석들이었다. 이쯤이면 이성을 잃어버린 꼴이 된다.
그들은 몇 년 후에 각기 승부가 갈라지는데 박태선 전도관은 사라져가고 문선명의 통일교는 일정한 자기 수준을 유지하고 있음을 본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활동을 진술할 때 4장에서 예수가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 4:17) 하시며 5장, 6장, 7장에서 율법과 인간,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상세하게 말씀하시고 8장부터는 병든 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신다. 문둥병자를 치료하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치료하시고, 무덤가의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를 고치신다. 죽은 아이를 고치고, 소경과 벙어리를 고치신다.
그러나 예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일을 흉내내려해서는 안된다. 예수는 병을 고치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따라 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는 12명의 제자를 골라 세우시고 그들이 예수의 권능있는 삶에 동참케 되었다. 12제자를 세우시고, 이어서 세례자 요한에 대한 평가를 하신다. 마태 12장 7절 이하의 말씀을 눈여겨 보면 세례자와 또 그를 따르거나 곁에서 지켜보는 이들 모두가 오해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마 11:11) 하셨으니 세례자가 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입으로 말하기가 민망할 정도이다.
왜 예수는 12제자 발표를 하고 그들에게 제자의 도리(道理)를 단단히 일러 주셨을까? 마태 10장 5절 이하를 읽으라. 제자의 길이 어떤 길인가를 알 수 있다. 제자들이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물론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4∼36)하여 제자들이 가야 할 길의 험난함을 예고 하셨다.
박해를 각오하라는 것이다(마 10:16∼ ). 그리고 제자는 최소한 선생의 수준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함을 말씀하신다.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마 10:24∼ )하여 예수의 길이 어디로 향하고 있음을 명백히 하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세례자 요한의 평가, 그리고 그의 위상을 말씀해 주고 계신다.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고, 복을 빌며,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전도자나 목회자는 먼저 그 자신의 인격(인품 또는 신앙의 수준)을 살펴야 한다.
수준이 있다. 옛 장인들이 물건을 만들 때도 대충 만드는 도구가 있는가 하면 예를 들어 옹기그릇 만드는 것과 고려청자나 이조백자를 만드는 경우, 우선 불질하는 것에서 큰 차이가 난다. 옹기는 몇 백도 수준의 불을 때면 구어지지만 청자나 백자가 제 색상을 드러내려면 가마에 불질을 할 때 약 1천 3백도 정도의 열을 올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자기 몫의 신앙을 지켜내기로는 어떨지 모르나 예수의 이름으로 남의 면전에 나와서 예수를 대신하려는 제자의 행위를 위해서는 단단히 준비하여 1천도 이상의 불속에서 달구어진 도구처럼 온전한 신앙조건을 갖추어야 제자일 것이다.
다시 병 고치시는 예수에게로 가자. 더구나 오늘 우리가 선택한 본문에는 한 편 손 마른 자의 구원을 위해 예수께서 또 바리새인들의 욕을 먹고 계신다.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한다고 저들은 예수를 비난했다.
손 마른 자 구원을 결행하시는 말씀에 대해서는 마태, 마가, 누가 (마 12:9∼14, 막 3:1∼6, 눅 6:6∼11) 모두 기록하고 있다. 손 마른 자라 함은 아마 중풍으로 한쪽 몸이 마비가 되었거나 아니면 한 쪽 손이 마비가 된 사람인 듯 하다.
몸이 불구이면 안식일 회당 출입이 쉽지 않을 터인데 이 사람은 회당 안에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물었다. 송사를 하려고 덫을 놓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한 쪽 손 마른 사람을 일부러 회당에 불러들인 셈이다. 회당 마당이 아니고 실내라고 보았을 때 그렇다. 또 예수께서 병든 자를 망설임 없이 치료하시는 것을 보고 저들은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마 12:14, 막 3:6, 눅 6:11) 하였으니 이게 바로 덫이요 올무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여기서 ‘바리새인과 예수’가 아닌 ‘우리들과 예수’로 배역을 바꾸어 보면 어떨까? 당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예수 때문에 분(憤)이 났던 바리새인들, 그 좋은 안식일날 같은 유대인이요 대체로 예수를 선지자 수준으로는 대접했으면서도 죽여 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음을 볼 때 그들의 처지가 참으로 딱하기도 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오늘 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열심 있는 유대인들처럼 기독교인들도 안식일 날 병 고치는 예수께 분한 마음 또는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의 기독교 분위기를 보고 있노라면 예수라 해도 온전치 못할 것 같다.
신자의 마음이면서도 예수(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말씀을 거역하는 ‘어떤 배교자’가 있다면 그를 죽일 수도 있는가.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내게서는 일어날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예수, 저들은 끝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데 안식일을 범하는 죄와 함께 사람일 뿐이면서 사사건건, 자기를 하나님과 관계지으며 마치 그 자신이 하나님을 독점하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행동하는 예수가 싫었던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불행했다. 안식일에 병 고치는 예수를 잡아 죽일 궁리나 하고, 또 겨우 안식일을 범하는 또 다른 열심의 유대인인 예수를 죽이려 했다니 그들의 인생이 참으로 안쓰럽다.
오늘의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바리새인들의 수준에 있는 정도가 고작이고, 다수의 사람들은 수준을 밑돌고 있다. 복음서를 계속 읽어보라. 또 조금만 더 깊이 있게 공부해 보라. 우리들 다수의 기독교 신자들이 바리새인들 수준에서 한 발짝도 더 나서지 못했음을 한탄하게 될 것이다.
너의 의(義)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마 5:20)이라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라. 안식일을 지키려는 그 열심으로 안식일을 범하거나 훼방하는 사람을 만나면 죽이고 싶을만큼 분한 신자도 있지만 혹시 그 자신이, 신자 자신이 그 스스로도 안식일(주일)을 범하면서 자기에게만큼은 관대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자.
이같은 사태 앞에서 우리는 또 어떤 판단을 하게 될까. 안식일 정도도 지키지 못하는 자기 자신,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 분개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라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안식일을 범한다고 판단하고 예수에 대해 살의(殺意)를 품는 어리석은 유대인과 설사,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병든 자를 치료하시는 예수의 결단을 함께 만나게 된다. 제자의 길을 지켜, 예수의 높은 품격으로까지 오르려 하는 열심으로 사람(생명) 사랑하는 일에 게으르지 말아야 하겠다.
〈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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