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살아온 시대는 2차 대전을 경험하고 나라를 잃은 슬픔을 겪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6.25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요 4·19와 5·16혁명을 거치며 나라의 시련기를 함께 한 세대였다. 그 중에서도 한국전쟁 때 약 3개월 동안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포함한 남한 일부를 북한이 점령한 기간이 있었다. 그 기간에 겪은 동족의 살상은 참으로 무서울 정도였다. 단순히 이념과 사상을 가려 살해하고 보복하는 동족간의 상처는 어떻게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가슴 아픈 사건들이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보복에 보복이 거듭되는 희생은 나라와 국민의 시련중의 시련이었다. 그 당시의 공포 분위기나 살벌한 감정의 대결은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겼고, 극한적인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정과 나도 큰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당시 우리 매형이 경찰 간부였고, 사촌형이 군인 장교였다. 따라서 경찰가족이요 군인가족이던 우리 가정은 당시의 내무소(경찰서)와 분주소(파출소)의 혹독한 심문을 받아야 했고 감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게다가 우리 집안 전체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요, 교회의 일꾼으로 모두 봉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 치하에서는 핍박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주변 사람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고 항상 숨을 죽이고 숨어사는 것처럼 살아야 했다.
그때 마침 당시의 북한군인 인민군에서 의용군으로 학도병을 반 강제로 모집하여 충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중학생인데도 의용군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가정을 보호하는 방법이 되었고, 불안한 생활을 하는 나로서도 다행스러울 정도로 피할 길이기도 하였다.
 9월에 이루어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울이 수복되면서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로 회전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이미 대전 근교의 훈련소에 들어가 훈련을 마치고 인민군에 배속되어 전투병력으로 편입하기 위해, 낮에는 교육을 받으며 잠을 자고 밤에만 행군하고 있을 때였다. 3천명 이상의 병력이 도로 양측으로 나뉘어 길게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명탄을 쏘아 대낮같이 밝아졌다. 그리고 이미 사방에 둘러싸인 산에 남한 국군들이 포위하고 집중사격을 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때 3천 여명의 우리 일행은 항거해 볼 겨를도 없이 수많은 총에 쓰러져 죽어 가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양옆이 둑으로 막아진 폭이 좁은 간헐천에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다행히 물이 말라 낮은 포복으로 피신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그 날 밤 여섯 시간을 포복하여 포위망을 뚫고 논과 밭을 가리지 않고 헤쳐나가 공주군 이인면까지 피하여 부대를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그런데 낮은 포복으로 피하는 몸이 되었을 때에 배낭의 짐을 벗어버리고 포복을 했으면 편했을 것인데, 나는 정신이 없어서 그 무거운 배낭을 지고 포복을 하여 무릎과 팔꿈치의 옷이 다 헤어져 몸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이 든 나는 산기슭에 있는 낯선 집에 찾아가서 사실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 집에서 자기 아들도 집을 나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농부의 옷인 잠방이를 내어 주어 그 옷으로 갈아입고 군복은 배낭과 함께 땅에 묻었다. 그 때 옷을 빌려 준 그분들의 온정에 지금까지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부여 은산으로 가는 방향을 물어 가다가 피할 수 없 어서 검문소를 거치게 되어 검문을 받았는데, 그 지역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는 면소재지로 끌고 갔다. 그 때 놀란 것은 얼마 떨어지지 아니한 지역끼리도 공산군이 지배하는 곳이 있었고, 한국 경찰 자위대가 조직되어 그들이 지배하는 곳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붙들려 간 곳은 공산군이 아직 지배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분위기를 몰라서 공산군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가 거기서 죽도록 매를 맞았다. 그리고 삼일간 삼백여 명과 함께 창고에 갇혀 있었다. 삼일만에 다시 끌려나온 나는 재조사를 받을 때에 “의용군에 자원해서 가지 않았느냐”고 내 자신을 변명하여 그들의 첫날 노여움을 풀게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군복을 잠방이로 갈아입을 때 호주머니의 소지품을 그대로 옮겼는데, 이곳에서 호주머니의 소지품 검사를 하자 내가 메모한 `허사가'(복음성가로 이명직 목사 작사)가 나오게 된 것이다. 나는 죽는 줄 알았다. 왜 그런가 하면 옆에서 불순분자는 총살을 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기적같이 경험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내 심문을 담당하던 사람이 허사가를 보더니 그것을 내 쪽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밀어주면서 호주머니에 빨리 도로 넣으라고 눈짓을 했다. 그 때 나는 직감적으로 `이 사람도 예수 믿는 사람이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마디 묻고 나서 자기 옆으로 오라고 하더니 팔뚝에 `검문'이라고 쓰여진 큰 도장을 찍어주면서, “누가 검문을 하거든 이 찍힌 도장을 보여 주라”고 하면서 야단치듯이 가라고 소리쳤다. 그 때의 그 위험 속에서도 하나님은 허사가로 나를 구해주셨다. 나를 검문한 사람은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는데, 공산치하에서 어쩔 수 없이 그들 속에 끼어 일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여기서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기간의 연단은 짧은 3개월이지만 수 십 년 동난 겪은 훈련이나 시련보다도 더 많은 분량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은평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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