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제자를 부르셨다. `제자'는 대개 스승의 완숙단계에서 찾는 대상이다. 종종, `제자를 두셨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는데 그때는 마치 못 들을 것을 들은 것처럼 멋적고 또 누군가가 들었으면 어찌하는가 하고 주변을 살피게 된다. 도(道)를 얻었다고 자부한지도 40여 년, 가르치기를 시작했던 때로부터도 40년인데 `제자 있느냐'라는 말이 내게는 아직도 조심스러운 이름이다. 그런데 예수는 `갈릴리 해변을 다니시다가' 어부들 가운데 몇몇의 이름을 부르신다. 물론 성경의 기록은 전후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을 생략하고 핵심이 되는 내용만 옮겼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겨우 삼십살 무렵의 예수이지만 그는 이미 완숙기에 해당하는 인격이었다. 그렇다. 예수께서 공생애 출발을 하실 때는 `진리의 몸'으로 완성된 상태로 보아야 한다. 자연인의 나이 삼십살이면 객기어린 청년기를 갓 벗어난 나이지만 열두살 나이에 나누셨던 성전대화를 상기한다면(눅 2:41∼52) 그날 이후 십팔년 정도의 기간을 보탰으니 넉넉한 구도의 날들이 될 수 있다. 제자를 부르셨다. 나를 따르라.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로 삼으리라. 이 말씀의 대상들은 행복하다. 어찌 단숨에 신분이 이렇게 격상될 수 있는가? 물고기 잡이가 인생교사가 되다니 그것도 단숨에, 참 신기한 일이요 파격을 만나는 순간이다. 나를 따르라. 시몬, 그는 베드로라는 별도의 이름을 가진 갈릴리 어부이다. 그는 예수께서 그의 배로 오셔서, 가까운 거리에서 자기를 지적하심에 크게 놀랐을 것이다. 누가복음에는 시몬 베드로가 예수를 만나는 절차가 매우 이례적이다. 호숫가에 두척의 배가 있는 것을 확인하시고 시몬의 배에 오르사, 그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우게 하시고 이어서 말씀을 하셨다. 이 방법은 청중과의 거리 유지 뿐 아니라 공기 흐름법을 통한 음성 효과를 노리심이라는 해석도 있다. 다중에게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하셨다. 제자 가르침 의미어로는 금쪽 같은 말씀이다. 그래, 깊은 곳으로 가도록 하라. 시몬은 역시 행복한 사람이다.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 `주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어도 얻은 것이 없지만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 시몬은 복이 있을 뿐 아니라 지혜와 명철이 탁월한 사람이다. 우리가 밤 낮을 가리지 않고, 또는 밤을 지새워 고기를 잡겠다고 허덕였으나 잡지 못했나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을 무시하고)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였으니 대단한 지혜요, 판단력이요, 결단력이다.  되는 사람은 이렇게 복(福)의 중심에 서게 되는 법이다. 시몬 베드로는 제자훈련기간에 무척 버겁고 또 힘들어 심심찮게 실수를 하지만 그의 출발점은 이렇듯 화려하다.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 네, 주여. 말씀에 의지하여 하겠나이다. 예수와 시몬 베드로의 선문답 같은 말을 주고 받음의 지혜담이다. 제자의 길은 깊은 곳으로 갈 수 있는 의지와 복종하는 힘이 있어야 한다. 물론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는 말씀도 하시지만 첫 제자들을 구하는 시간에 `깊은 곳으로…'를 명하시고, 또 그 시간에 `말씀에 의지하여…'를 터득한 제자를 얻으셨으니 두 사람 모두 복이 있는 사람들이다. 여기 시몬과의 대화에서 예수는 스승과 제자, 스승은 누구이며 제자는 또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다. 갈릴리, 저 옛날 이사야의 글에 `스불론과 납달리 땅과 요단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마 4:15∼16)라고 기록된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라 하였으며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는 반복성 발언을 하였으니 우리는 이를 강조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흑암이요 어둠'이라 하여 고달픈 그들의 지난 날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빛'이 임하였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임마누엘 하나님의 메시아 예수가 갈릴리 호숫가 어부들 사이에 나타나셨다. 제자를 부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역사 이래로 문명권에서는 스승과 제자는 사명(진리)의 전수 당사자들의 관계를 말한다. 제자를 따로 두는 학문이나 종교는 발전하고, 아닌 경우 몰락하게 된 역사를 우리는 알고 있다. 동서의 종교들이 그러하고, 기독교의 경우에도 바울과 베드로, 또는 바울과 요한은 탁월한 제자들이다. 특히 요한복음과 같은 수준은 예수의 어깨죽지를 툭 치고 창공으로 높이 오르는데 이는 개가이며 개선이다. 예수는 베드로를 얻고, 그 뒤를 이어 바울, 그리고 새역사 21세기에는 요한복음을 얻으신다. 깊은 곳으로 가라, 네 저는 오로지(저의 경험이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여 복종(순종) 하겠나이다. 여기서 시몬 베드로가 나오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 2:20)하여 바울, 그리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를 깨달은요한복음 저자의 발언인데 이는 바울의 진액이 다 마르고, 기독교 더는 나아갈 길 없을 21세기용 말씀이기도 하다. 제자들이다. 이렇듯, 나의 하는 일을 너희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 하신 예수의 말씀 따라서 베드로와 바울이 이끄는 시대 2천여년, 그리고 이제는 요한복음 기록자의 그룹이 새시대의 문을 열 것이다. 예수의 제자 선택의 안목은 탁월하다. 우선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넉넉하게 잡은 시몬이 예수의 발 앞에 엎드렸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죄인이로소이다'(눅 5:8). 종교의 한 형태가 완성이 되는 순간이다. 완벽한 관계이다. 말씀(교훈)이 넉넉한 제자의 도를 이루는 순간이다. 이는 베드로의 경지이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이다. 예수는 시몬을 잘 아셨다. 어느날 갑자기 갈릴리에 오셨을까? 아닐 것이다. 그들 시몬과 그의 친구들은 갈릴리 토박이들이다. 그들은 가끔씩 그들을 스쳐 지나가시는 예수를 보았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갈릴리' 노래를 부른 이사야의 마음을 아시고, 또 이사야의 노래(예언)에 화답(응답)하심이 갈릴리를 선교센타로 삼으시는 뜻이었다면 예수의 갈릴리 관찰 또 어부들을 눈여겨 보심이 결코 만만치 않으셨을 것이다. 시몬(베드로)이나 세베데의 두 아들(야고보와 요한)이 예수의 관심이었음은 두말할 필요 없으리라. 보라. 시몬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이들 세 사람은 열두제자 중에서도 주요인물들이다. 열두명 중에서 대표를 뽑으실 때는 언제나 저들 세 사람이었다. 시몬을 부르시고,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눅 5:10∼)하는 자들을 부르셨다. 예수가 지명한 곳, 깊은 곳에 그물 던지니 많은 고기가 잡혔다.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고기잡이로 잔뼈가 굵은 저들이 어디 쯤에 고기가 많다는 것쯤은 예수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지시한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니 고기가 잡혔다. 고기가 있을 수 없는 곳에서 고기가 잡혔다. 이는 `어떤 섭리'가 아닐 수 없었다. 시몬은 알아차렸다.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했다. 어찌 야고보나 요한인들 두렵지 않았으랴. 시몬은 큰 인물이다. 그래서 필자는 일찍이 기독교 초기 1천년은 시몬 베드로 역할, 후기 1천년은 바울, 그리고 21세기 이후 기독교 완성기 제자는 요한복음의 기록자인 그 사람, 이들 제자들이 예수의 복음세계를 완성 짓는다고 필자는 주장한 바 있다(요한묵상 참조). 제자여! 그대들은 스승을 알지, 스승이신 예수여 내가 여기 시몬이나 바울, 요한보다 더 간절함으로 제자이기를 원하나이다..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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