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산상보훈이라 한다. 보훈이면 보배로운 교훈이라는 뜻일게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복음’이라는 표현이 아니고 ‘보훈’이라 했음을 주의 깊게 살피고 싶다.
기독교는 마태복음 5장의 출발점에서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로 출발하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로 이어지는 말씀을 거듭 마음으로 가까이 해 보라.
산상보훈은 기독교(신교) 쪽 사람들의 정서로는 하나의 도덕률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기독교 사람들은 믿으라, 믿기만 하라,는 식으로 귀가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산상수훈은 그저 듣기 좋은 말일 뿐으로 넘기는 사람들이 많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체질이 아닌 내용이라는 것이다.
사실, 산상수훈이 4복음서 중에서 유독 마태복음의 몫이기에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물론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 23절, 14장 34절에서 35절, 6장 29절에서 30절, 6장 27절에서 28절 등에서 산발적인 방식으로 마태복음의 흐름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요즘 더 자세히 보면 마태복음 5장 12절 이후의 말씀들과 6장, 7장과의 만남이 마태와 누가의 만남일 뿐, 5장 3절에서 12절까지의 부분은 누가도 피해 가고 있음을 본다.
본 지면이 본격 강해가 아니기에 더 상세한 비교는 사양하지만 사실, 공관복음을 하나의 흐름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기술상 무리임도 우리는 서로 양해했으면 한다.
필자가 공관복음의 중심축이 무엇일까? 또 과연 마가복음이 중심을 지킨다면 마태, 마가, 누가의 이름으로 말해지는 `공관복음'은 자기 몫을 대강 감당하는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글을 만들어 보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마가복음은 포괄적으로 하나님 나라(하늘나라) 복음이요, 마태복음은 유대인과 그 출신들을 위해서, 누가복음은 헬라인과 이방인을 위해서 기록한 책이라는 통설에 동의해야 하는지는 모든 개인들의 선택일 것이다.
자 다시 마태의 산상수훈을 주목하자. 산상수훈의 핵심은 소위 ‘8복’이라고 하는 5장 12절까지의 말씀이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부분이다. 8복은 사실, 유대인들이나 기독교인들의 사유체계를 뛰어 넘는다. 예수의 생애와 사상을 무한 축소한 말씀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어느 천재의 비범이 찾아낸 하늘나라의 깊은 세계를 노래했다고 말할 수 있다. 간단한 결론으로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하신 말씀이다. 이 산은 성경학자들 간에 헬몬산이냐, 다볼(타볼)산이냐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헬몬산은 해발 2천미터가 훨씬 더 되는 산이니 다볼산으로 기울어졌다. 다볼산은 나사렛이나 갈릴리와도 가까운 조건으로도 다볼산이 아니겠느냐로 생각이 현재까지는 모아진 줄 안다.
산이야 어디든지 간에 8복의 말씀이 어찌하여 마태복음에만 기록이 되었느냐고 의문을 가져야 한다. 예수의 활동기 초의 말씀인데,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만 모습을 드러낸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저자와 저작연대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해 보고 싶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마태복음은 베드로가 사망한 AD 65년경이나 예루살렘 멸망이 AD 70년 이전의 기록으로 저자는 예수의 제자 세리였던 가버나움의 마태(또는 레위)라고 믿어 왔으나 요즘은 마태가 아닌 별도의 인물이라 하고, 저작연대도 AD 80년대 초로 본다. 저자는 누굴까? 헬라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아는 유대파 기독교인으로 유대교의 랍비 정도의 위치에 해당하는 인품을 가진 인물로 보는 학자들이 많다.
마태복음 저자는 구약의 해박한 지식을 본문에서 느끼게 한다. 자신감 넘치는 필치로 집필지역은 안디옥으로 본다. 구약을 자유롭게 인용하고,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 사상을 놓치지 않는 민첩함은 물론 유대사상에 대한 신뢰가 굳건해 보이는 듯 하면서도 기독교의 중심사상이 흐트러지지 않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지금까지 성경학자들이 그저 마가복음을 원본으로 한 변형 저술로써 유대교 출신자들에게 구약과 신약의 자연스러운 만남을 시도한 작품으로 보았으나 필자는 좀 생각이 다르다.
산에서 조용히 말문을 여시면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애통하는 자는 온유한 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화평케 하는 자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이라 하는 말씀을(가장 의미있게) 들을 수 있었던 마태복음 저자는 다른 공관복음 저자들이나 예수의 여러 제자들이 듣지 못했던 부분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들을 귀 있는 자’가 듣는 법이니 그래서 그를 비범한 인물이라 하고 싶다.
여기 오늘 우리가 말하고, 또 그 뜻을 살피고자 하는 8복은 기독교나 유대교 사상의 범주를 뛰어넘는 부분이다. 단순 유대주의나 헬라사상의 맹신자들의 영역 밖에까지 폭을 넓혀야 할 것 같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기수준에다 예수를 한정시키려는 야심을 갖고 있으나 예수는 기독교인들의 요구를 뛰어 넘는다. 8복의 말씀은 유대교나 기독교 모두를 가지고 받아 들여 보고 싶어도 그 그릇이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기독교인들이 단순하게 산상보훈(산상수훈)이라 하여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된 도덕률(율법, 교훈, 잠언) 정도에 만족하려 하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8복은 기독교가 놓쳐버린 예수의 가르침 3개중 하나이다. 기독교는 8복의 가르침(마 5:3∼12)을 해석할 실력이 없다. 또 하나는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고 겟세마네에서 선언하신 비폭력 교훈 또한 감당할 능력이 없다. 그리고 이 성전을 헐라, 하신 요한복음 2장의 그 말씀이 탈종교, 기독교 종교 아님의 가르침인 줄 모르는 기독교는 더 이상 세상을 가르칠, 그래서 하늘나라의 주인공 되기가 힘들게 되었다.
그럼, 8복으로 가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 했는데 헬라어 (호이 프토코이 토 프유마티)라 했는데 이 부분의 해석이 중요할 것 같다.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말이 무엇일까? 헬라어를 꺼내보았으나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 볼 부분은 <&34865><&34871><&34893><&34891><&34853><&34828> 즉 기본어인 <&34865><&34871><&34893><&34891><&34854><&34929> 에서 의미를 주목해야 할 것이다. <&34865><&34871><&34893><&34891><&34854><&34929>는 어원 <&34865><&34871><&34893><&34664><&34664><&34893>(웅크리다)에서 흘러나온 형용사로 구걸하는, 거지같이 가난한(롬 15:26, 갈 2:10) 빈궁한(계 13:16) 거지(눅 16:20, 22) 등인데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가 해석되려면 ‘가난한’이라는 말을 반어(反語) 처리해 주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잠시 헬라어를 살펴보았지만 언어는 그 어느 나라의 것이든지 간에 진리를 다 말하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것 같다(요 21:25)
기독교인들은 언어학, 언어미학을 많이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설령 헬라어나 히브리어, 라틴어나 독일어 또는 영어에 해박하다 해도 진실을 놓쳐 버리기 쉽다. 특히 언어에 자신이 있는 사람일수록 함정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사람, 道가 道 非常道라 했던 노자(老子)를 맞상대 할 수 있을 만큼의 단계까지에서라야 숨어 있는 진리가 방긋이 웃으며 나를 반겨 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임이요를 이렇게 해석해 보자. 가난을 무소유(無所有)로 해석하는 것이다. 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내것이라 하지 않는 이라고 말이다.
마태복음 저자는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2절을 들어 이를 소화하고 기록할 수 있어서 요한복음 저자를 상대할만한 사람인 듯 하고 그래서 그가 숨겨둔 말씀이 오늘 우리를 설레게 한다.
.본지 발행인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