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 생활

1995년 봄은 내게는 형용할 수 없이 감격스러운 해였다. 그 해가 바로 서울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서울신학교에 입학한 해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별을 딴 것처럼 기뻤고 모든 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었다. 그렇게 반대하던 아버지께서 등록금을 내 손에 쥐어주면서 “서울에 가서 조심하고 건강해야 한다”고 부탁하시던 모습은 정말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다정한 권면이었다. 처음 집을 떠나는 아들이고 기숙사 생활을 한다고 하니까 여러모로 걱정이 되어서 하신 말씀이셨다. 좀처럼 말이 없었던 아버지의 이 몇 마디 부탁은 등록금과 함께 아들에게 최선의 관심을 쏟는 표현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뜻을 꺾고 신학교를 택한 것이 죄송하기도 했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할 수만 있으면 신학교 등록금은 내가 고학을 해서라도 담당하고 싶은 생각이었다. 신학교 입학을 반대하신 아버지였기에 염려를 덜어드리려는 내 생각이었으나, 아버지의 아들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달랐다.
 서울로 올라가는 나를 배웅하는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과거에 신학교 입학을 반대하던 때의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두 내외분이 바라보고 계신 모습을 보고 정말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했다. 그 때 울면서 길을 걸었던 나 자신의 모습은 아버지의 사랑에 보답하는 뜨거운 답례였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주고받는 사랑은 조건이나 환경이나 어떠한 상황이든지 절대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역시 아버지였다.
신학교에 가서 등록금을 내고 배정된 기숙사는 다다미방이었다. 1학년생 13명이 넓은 방을 함께 쓰게 되었다. 학생 하나 하나가 벽을 향해 책상을 놓고 둘러앉아 공부하는 방이었다. 저녁에는 군대의 내무반같이 양 벽으로 머리를 두고 나란히 누워 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기숙사 생활은 서로 대화를 많이 할 수 있고 금새 친교를 나누게 되어 너무 즐거운 시간으로 바뀌었다. 우리 1학년 학생은 50명을 모집하는데, 102명이 응시하여 52명이 탈락하였다.
 물론 개중에는 사명감이 없이 주변 사람의 권유로 온 사람이 소수 있었지만, 거의 다 헌신을 목표로 입학한 학생들이었다. 당시 서울신학교는 이명직 목사님이 학장이셨고 교수진도 철저한 복음주의의 실력 있는 교수진들이어서 학생들의 학교생활은 불만이 없었다.
 새벽기도를 의무화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갖는 채플시간에는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를 정도로 뜨겁고 은혜로웠다. 이명직 학장님은 말씀을 전하면서 “거듭난 체험이 확실하냐?”고 묻고는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항상 권고하여 예배시간마다 크게 통회하며 변화 받는 학생들이 그치지 않았다. 본과, 전수과 합해서 250명 정도의 학생이었지만 정말 예배 분위기는 몇 천명이 모인 집회만큼 은혜스러웠다. 당시의 전수과는 3년제로 진학의 기회를 놓치고 나이가 들은 분들이 늦게라도 헌신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제도였다.
 한번은 이명직 목사님이 설교 도중에 “말씀을 읽다가 울고, 말씀을 읽다가 웃고, 말씀을 읽다가 무릎을 치고, 말씀을 읽다가 춤을 춰라”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에 붙들리기 전에는 목사가 될 생각을 하지 마라”고 권고하셔서 기숙사 안에서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교내 부흥회가 열리면 많은 학생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회개한 간증을 나눔으로 영적으로 더 뜨거운 분위기가 되었다. 평소에도 아침, 저녁, 때를 가리지 않고 교실이나 학교 강당이나 기숙사 방에서 기도하는 기도 소리가 그칠 줄을 몰랐다. 이러한 분위기에서는 영적으로 붙들릴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적응이 안되면 학생 스스로 자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곤 하였다.
또한 그 때는 사감 교수님이 학생들의 편지를 일일이 열람했기 때문에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면 퇴학당하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서울신학교를 보수적인 신학교라는 별명으로 `떡집' 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감리교신학교나 한국신학교, 총회신학교까지도 서울신학교를 목회자가 되는 데는 더 없이 좋은 학교라고 선호할 만큼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로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신학교의 분위기가 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철저한 경건 훈련으로 학생들이 길들여졌기 때문에, 서울신학교는 신학교이기 이전에 수도원과 같은 분위기로 느껴질 만큼 영성훈련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분위기에 흡수되지 않는 학생들은 스스로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반도 50명이 입학했지만 17명만 졸업했을 정도로 졸업생의 수가 적었지만 다 목회자로 헌신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그 당시는 신학적인 학문보다 성경을 중심으로 공부하는 권별 강해가 대부분의 수업이었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는 데는 더 유리했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서울신학교는 목회자의 정예부대를 양성하는 학교로 생각될 만큼 영적인 분위기로 충만했었다. 이 때에 나도 아침, 점심, 저녁 이렇게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습관을 몇 몇 친구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다.
/은평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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