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끝내 이루는 하늘나라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2절까지를 아직 떠날 수 없다. 우리는 `어찌하여 마태복음 기록자 혼자서 8복 부분의 말씀을 들었으며 또 기록하였을까'에 대하여 궁금증이 많다. 예수의 복음활동 초기의 내용기록인 듯 하나 말씀하신 시기에 대하여는 알아내기 어렵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종종 하셨으나 제자들은 그냥 ‘좋은 교훈이로다’하고 넘어갔지 않았을까.
사실 세상에 있는 교회들이 대체로 ‘좋은 교훈이로세’ 하는 자세로 이 말씀을 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를 해석할 때 가난이 등짝에 딱 달라붙은, 그저 거지중의 거지 정도의 처지를 가난이라고 할 수도 있다. 겸허한 자, 간디가 말했다는 땅바닥에 코를 박을 만큼의 겸손이 동반된 가난을 말한다. 더 나아가서 여기서 말하는 가난, 곧 심령의 가난이라 한 말은 정신적 가난, 영적인 가난, 소유의 개념을 떠난 하늘의 주인 같은 가난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서로 보완 설명하여 이해를 도울 수 있는 나머지 복 일곱 개도 그 보따리를 풀어보자. 두 번째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 했다. 여기서 ‘애통하는 자’는 자기 개인의 실수나 사고로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서 ‘애통’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의 처지를 매우 딱하게 여겨서 슬픈 사람들이다.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를 받아주지 못하는가. 이해하지 못하는 자, 나누지 못하는 자, 섬기지 못하는 자, 잘하면 쉽게 풀어낼 법한데 엉켜서 모두가 고통 하는 인류의 아픔을 안타까워 하면서 우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 하였다. 성품을 풀이하는 것으로는 조용하고 묵묵히 자기 일에 몰두하는 성격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시 여기에서도 온유한 자는 인생의 의미를 터득한 사람을 말한다. 사람이 겸허하고 과묵하여 자기를 낮출 수 있기는 배워서 가능한 것이 아니다. 옛말에 경험이 선생이라 하였듯이 사람이 온유한 성품으로 가다듬어 지기까지는 많은 경험과 교육과정을 거친다 함을 알아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어떤가? 의(義)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역시 이 세상의 구조와 현실의 처지를 바라보면서의 내용이다. 사람들이 악한 성품을 버리지 못하고 서로를 해치고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나라들은 전쟁을 쉬지 않는 등 이 세상이 결국 8복의 첫 번째 말씀처럼 ‘심령의 가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거짓들이 자꾸만 더해 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표현에는 의를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능동적 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 의의 본질이 있다. 몸을 사리고, 평소에는 큰소리치다가 몸이 상할 수도 있는 격전지를 피하는 잔재주가 있는 사람은 여기에서 예외이다.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살벌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를 얻어내기 위하여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진 자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당시 예루살렘 종교기득권자들과 싸우지 않아도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선지자요 권능이 있는 사람이라 하였다. 당시 제사권과 로마 총독부를 도와 일부의 치안을 담당하는 수준의 통치력을 행사하던 사두개파 제사장들과 산헤드린 회원들, 그리고 바리새파 각파의 강경파들이 주도하는 예수 핍박자들을 피하여 잠시 예루살렘 출입을 삼가하였으면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는 의(義)를 이루기 위하여 죽음의 길인 십자가를 향하여 달려갔다. 사람들(제자들)과의 타협도 없이, 누가 쫓아오지도 않았는데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요 12:23)면서 그리로 갔다. 여기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있다.
예수께서 마태복음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신 사람은 예수 자신의 앞날, 그리고 현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곁에는 비겁한 자들은 필요 없다.
다음으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긍휼히 여긴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이다. 동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인간은 모두 고독한 자들이니, 또 그리움이 많은 자들이니 그들에게 긍휼이 필요함을 아시고 예수는 긍휼이 넉넉한 사람이 되어달라고 하신다.
우물에 침 뱉는 자들, 다시는 이 물 먹고 마시지 않는다 했으나 인간은 별수 없는 것, 그 물 다시 마시게 되어 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인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철부지들이다. 인간의 백년 삶이란 언제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막말을 해서는 안된다.
어느 구름에서 비올 줄 모른단다, 하시는 어머니의 교훈을 배우면서 유년기를 보낸 필자는 사람이란 함부로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는 존재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그래서 60살이 넘은 이 시간까지 어느 누구의 뺨 한대 때려 본 기억이 없다. 내가 누구의 뺨을 때리며, 또 누구를 평가하겠는가, 모두 함께 긍휼을 입어야 할 생명들인데…하면서 말이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주변에 인심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사람이 모여 외로움을 덜어주며 서로의 마음을 넓혀 기쁨을 더하게 한다.
또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 요한복음 14장 8절을 열면, 빌립이 예수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한다. 제자 된 도리로써 3년을 예수께 배웠으니 하나님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기도 할 것이다.
어느 누군들 그런 열망이 없겠는가. 그러나 예수께 하나님 보여 달라고 말한 빌립은 사실상 예수께 꾸중을 들은 꼴이 되었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빌립 뿐인가. 하나님 얼굴이 한 번 보고 싶어서 마음 간절한 사람들은 여기 마태복음 5장의 청결한 마음의 사람을 먼저 만나볼 필요가 있다.
마음이 청결하다. 맑고 깨끗하다. 거짓이 없다는 수준을 뛰어 넘는다. 마음이 청결하다 하였으니 자기 혼자서의 내면을 말하는 것일까. 다음 말씀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하였다.
마음이 청결한 자와 화평을 부르는 자는 성격이 다르지 않다. 마음의 청결은 자기 내면의 관리이고 화평은 주변 환경과의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그 마음의 덕을 쌓아 사회를 폭넓게 이롭게 하자는 것이 된다.
화평을 부르는 일이란 사심이 있는 자들은 하지 못한다. 사사로운 자기 이익을 먼저 챙기고 끼리끼리라고 하여 파당을 짓는 행위 또한 사심이 많은 사람들의 소행이려니 그들은 화평을 이루지 못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하다' 함은 자기 이익을 좇아서 어느 편에 뛰어드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동서남북, 하늘과 땅, 하나님과 예수님, 그 어느 누구의 편에도 속하지 않는 자가 마음이 청결한 자이다. 예수님이 좋지만 예수님께도 특별히 마음을 기울여 주변에 부담을 주는 일이 없는 자, 그는 마음이 청결한 자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으며 그는 또 화평의 사람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전체로 정리하자.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있는 자, 거기에 하나 더 마음이 청결한 자는 화평의 주인공인데 이 사람은 하나님의 자식이다.
다시 말하여 마태의 8복은 하나님 아들의 수준을 말하고 그 아들 되는 자격 요건이기도 하다. 전체의 말씀이 개인과 하나님 또는 전체와의 관계를 분리하지 않고 있다.
진리는 전체와 개체를 나누는 것을 거부한다. 하나님과 나의 갈등을 용납하지 않듯이 말이다. 끝으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하셨는데 이는 천국의 복음에는 싸움, 투쟁을 필요로 한다는 말씀이기도 하다. 칼과 창으로가 아니라 심령의 가난,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세, 긍휼과 청결, 화평을 깨지 않는 자세를 지켜내기 위하여 아닌 것들과 싸우라고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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