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0만 신자 적지 않다, 내실을 기하자 〈13〉

종교개혁 489주년-② 종교개혁 3大 개혁 중 하나인 `만인제사장'

종교개혁 주창자 마틴 루터가 외친 ‘만인제사장’의 시대는 오지 않는 것인가

종교개혁의 주창자 마틴 루터가 외친 개혁의 내용 중에는 아직도 그것의 실현, 시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만인제사장’이 있다. 그런가 하면 그 시대에 ‘개혁’에 몸부림 친 사람들 중 돋보이는 인물인 토마스 뮌처가 주장했던 개혁의 내용도 채 꽃피우지 못하고 사그러들었다. 종교개혁 489주년을 맞아 2회에 걸쳐 이 두 부분을 살피며,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실현돼야 할 것들인지 짚어본다.

루터의 ‘만인제사장’

루터의 3대 개혁이라 함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그리고 ‘만인제사장설’ 등 세 가지다. ‘성경’과 ‘믿음’ 부분에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다각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고 있지만 ‘만인제사장설’은 오늘날에는 잘 언급되지 않고 있는 부분이다.
만인제사장이란 ‘모든 신자는 외부로부터의 간섭이 없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주장이며, ‘신자(인간)는 사제나 교황의 도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16세기 초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루터는 독일의 크리스찬 귀족에게 보낸 글에서 당시 시대에서는 쉽지 않은 ‘만인제사장’에 대해 정확하게 피력하고 있다. 루터는 직업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자간의 근본적인 차이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다. 하나의 세례와 한 분 하나님과 하나의 신앙을 가진 평신도들은 사제나 감독과 마찬가지로 성별(聖別)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관리나 상인이나 농부나 노동자나 어떤 계급의 사람을 막론하고 그들의 직업의 차이는 있으나 그 외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루터는 이런 주장의 성경적 근거로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제사장 같은 나라’(벧전 2:9)와 ‘당신은 당신의 피로써 저희를 제사장 왕들이 되게 하셨나이다’(계 5:9~10)이라는 것을 제시한다.
사제나 주교나 교황과 같이 ‘영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그들의 일과 직무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례전의 집행을 맡고 있는 것 외에는 다른 크리스찬들과 아무 차이가 없고 우위에 있지도 않는다고 루터는 말한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는 각기 자기들의 일과 직무를 맡고 있으면서도 그들은 다 성별받은 사제와 주교와 같다는 것이다. 각기 자기의 일이나 직무에 의해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섬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또한 강조한다.
“교회법에 있어서 성직자들의 자유와 생명과 재산에 너무나 중요성을 두어 마치 평신도는 그들과 같이 영적이고 선한 크리스찬이 아니거나 또는 교회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된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 때문에 여러분의 생명과 지체, 재산과 명예는 그처럼 자유롭고, 나의 것은 그렇지 못한가? 우리는 다같은 크리스찬이며 같은 세례와 신앙과 성령과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루터는 이렇게 말하면서 만일 어떤 사제가 살해를 당한다면 그 지방은 성사(聖事)를 금지하는데, 농민이 살해를 당하면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동등한 크리스찬들을 이와 같이 크게 구별하는 일이 어디서 오는가 라고 반문하면서 “이것은 다만 인간적인 법령과 조작품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루터는 로마교도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교를 다루고 있는지를 비난한다. “그들은 성서의 증거도 없이 그 자신들의 사악한 심사로 그리스도교에서 자유를 빼앗아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들은 물론이고 그들을 세속적인 칼에 복종하게 만들 것이다. 이것은 적그리스도의 장난이 아니면 적그리스도가 바로 곁에 있다는 징조가 아닌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루터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성례들을 포함하여 교회의 보화들에서 동등한 몫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설교자, 교사, 혹은 상담자가 될 수 없음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의 공통적인 신분이 있으되 직책과 직능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말씀의 사역을 교회의 최고 사역으로 간주한 루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목사이며 설교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치기도 했다.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만인제사장

이에 대해 티모디 조지(캔터키 주 남침례신학교 교수)는 〈개혁자들의 신학〉이란 책에서 “위기의 시기에는 여성, 어린이, 무능력한 사람들이 만인제사장직에 따른 그들의 몫을 근거로 직책을 수행하는 것을 허용했지만, 이상스럽게도 자연법을 근거로 주장하면서 이러한 사람들을 교회의 공식적인 사역으로부터 배제시켰다”면서 “종교개혁의 위기 사태들 때문에 루터의 초기의 회중주의는 지속될 수가 없었다”고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또 한 교회사가는 “16세기 개혁 중에서 발전하지 못한 ‘만인제사장설’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미완성 개혁으로 남아있음을 알려주고 있다”면서 “루터는 농민들의 요구가 타당한 것으로 보았으나 극심한 폭동으로 발전하고 불법이 저질러지자 귀족과 군주의 편을 들었다”고 지적했다. 또 “루터는 군주들의 횡포는 내가 책임질 것이 아니고 도리어 농민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면서 “만인제사장 신학은 결코 평등주의를 말한 것이 아니고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이라고 해명했다”고 지적했다.
루터가 처음에 강경하게 주장했던 ‘만인제사장’의 내용들이 후대에 사그러든 것을 반영하듯이 21세기 오늘 우리 현실에서는 모든 목회자와 평신도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신자’이지만 여전히 그렇게 얘기하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
오늘날 평신도 선교사가 강조되고 있지만, 우리의 현실은 아직까지도 ‘목사’를 선호하고, ‘평신도’를 등한시하는 태도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설움을 받는 평신도 선교사들은 서둘러 “목사 안수”를 받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도 ‘직능’상의 차이라고 얘기하지만, 목사와 평신도가 높음과 낮음 등으로 비교되기 일쑤다. 한 ‘목사’에 의해 교인들이 울고 웃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또 수십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목회자’에 의해 ‘휘둘리는’ 평신도들을 어떻게 ‘사제’급이라 볼 수 있는 것인가.
많은 교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세습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덮어놓고 세습을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는 지적들이 있지만, 아버지가 담임했던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하는 것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은데도 굳이 그 교회에 앉혀야 직성이 풀리는 현대의 모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목회자의 권위를 이용해서 신자들의 눈을 멀게 하고 판단을 흐리게 하는 모습들은 없는 단지 이것 뿐인가.
대형교회의 경우는 그 폐해가 심각하다. ‘○○목사님이 없으면 ○○도 없다’는 도식의 말들(표현)이 염려스러워서인지 대형교회 담임 목회자는 최근 큰 집회 중에서 “높임을 받는 분은 성령님 밖에 없다. 인간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강조하는 해프닝까지 드러나고 있다.
오늘날 우리 현실 속에서 평신도가 말씀과 성례전을 수행하는 교회는 아주 미미하다.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조금씩 생성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찬성하지 않고 기존의 교회 질서를 따라야 한다는 목회자들이 대다수다. 그 이유들은 “교회에도 질서가 필요하다”, “교회(신자)들이 아직 덜 성숙했다”, “남발될 소지가 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관습’과 ‘전통’이 유지될까. 하나 둘 씩 평신도들이 주체적임을 교회의 현상 가운데서도 실현될 수 있도록 ‘제사장’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양승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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