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0만 신자 적지 않다, 내실을 기하자 〈14〉

종교개혁 489주년-③ 루터의 개혁을 `재개혁' 시도한 토마스 뮌처와 멘노 시몬스

토마스 뮌처의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의 선두주자 루터와 칼빈에게 감히 도전하는 개혁운동가들이 있었다. 이들은 유아세례 반대와 ‘국가교회와 같은 교회국가 형태에서 신자는 참된 신앙을 유지할 수 없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들은 재세례파(Anabaptists)라 불리었다. “어린아이에게 무슨 인격이 있다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느냐? 세례란, 자기고백이 가능한 성년들이 받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유아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베풀었다. 저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 뿐 아니라 국가에 예속된 교회나 신자에게는 순결이 없다고 주장했다. 중세기 1천년동안 교회가 국가와 동일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타락했다는 점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주장하는 재세례파를 향해 국가나 로마교회는 물론 루터나 칼빈과 프로테스탄트들은 한결같이 악의에 찬 방법으로 핍박했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하여 재세례파 개혁가들이 박해받게 되는 아이러니한 이들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것은 이것외에 외형적인 성경말씀이나 성례전보다 사람들의 심령에 나타나는 성령의 직접계시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문제가 되었는데, 이 주장은 특히 루터나 칼빈파에게 큰 충격을 주는 내용이었다.
 재세례파는 완전한 개혁을 주장했다. 교회가 교황제도에서 뿐 아니라, 모든 전통 사상과 옛 질서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들 재세례파는 완전한 새종교의 출현을 열망한 것이다.
 재세례파에는 초기에 참으로 경건하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취리히에서 츠빙글리와 함께 일하던 동역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펠릭스 만즈(Felix Ma-nz), 조지 블라우록(George Blaurock)과 그 밖의 동지들은 츠빙글리와 의견을 달리하고, 1523년에는 츠빙글리와 충돌을 일으켰으며, 1525년 취리히 개혁회의에서 정죄되었고, 정부 관리들이 츠빙글리의 편에 서게 되자 끝내는 쫓기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츠빙글리의 강경한 태도에 몰려 펠릭스 만즈의 죽음을 시작으로 무자비하게 학살되었다. 프로테스탄트에 의해서 프로테스탄트가 박해받고 또 순교 당하기는 이 사건이 공식적으로는 처음이었다. 또 다른 재세례파들도 취리히, 북부 스위스, 남부 독일로 쫓기면서 죽어갔다. 쫓기고 죽어가면서도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재세례 예식을 행하였다. 1525년 부활절에는 조그마한 접시에 담긴 물로 300여 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렇게 초기 재세례파가 북부 스위스나 남부 독일에서 쫓기고 죽임을 당하여 세력이 약화되어 갈 때, 그들 중 혁명적인 기질이 있는 단체가 별도로 급진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즈빅코 예언자단(Zwickau Prophet)인데, 그들의 지도자는 루터교단 목사였던 토마스 뮌처(Thomas Munzer)였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환상을 보며 꿈을 꾸는 사람인데 교회의 종탑에 있는 작은 방에서 하나님과 은밀한 교제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성도의 나라”를 세우자고 요구했다.
  뮌처는 “성도의 나라”의 조건으로 모든 소유는 공동소유로 하는 경제정책을 주장했고 성경만으로는 그리스도인의 가르침으로 충분하지 않으니 성령의 가르침을 별도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현존하는 사회제도를 뒤엎고 특히 루터를 비롯한 온건한 개혁자들과의 투쟁을 선언한 뮌처는 1524∼1525년까지의 농민전쟁의 기간에 활동하였다.
 그러나 뮌처는 농민전쟁 기간 중에 죽임을 당했고 농민전쟁이 귀족들의 승리로 돌아감으로 뮌처의 재세례파도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루터가 농민전쟁에 대하여 단호한 입장을 취했던 점은 뮌처의 재세례파가 농민전쟁을 어느 만큼은 조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 농민전쟁은 단순한 농민들의 자각이었다기 보다는 프로테스탄트의 “두 모습”이 서로 갈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루터와 뮌처의 주장에서 크게 대립되는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오직 성경 : 성령주의다.
루터가 로마교회의 엄청난 부패에 항거하여 홀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성경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그는 로마교회의 부패를 발견하게 하였고 그 부패에 부단히 맞설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뮌처에게는 성경만이 유일한 계시가 아니며 성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성경외의 또다른 계시, 곧 개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는 계시가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오직 믿음 : 제자도이다.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 곧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롬 1:17)는 것이었다. 그러나 뮌처는 ‘칭의는 실존적인 개인의 체험신앙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고백한 자의 순종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고 말했다. 뮌처는 믿는 자의 표시는 세상적인 행동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순종함으로 드러나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은 다름 아닌 사회정의의 실현이라고 했다. 뮌처의 이신칭의는 영혼 속에 들려지는 성령의 계시에 따라 역사 사회 속에서 거룩해지는 것, 즉 뮌처의 의는 역사적^사회적 실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셋째, 두 왕국 사상 : 종말론적 왕국이다.
루터는 복음과 성령의 주권영역인 그리스도의 왕국과 죄와 율법과 죽음의 세계인 불신앙의 세상을 구분하였다. 종말의 임박성을 느끼기는 했지만 신인협동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하려는 것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뮌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신인협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뮌처는 두 왕국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사가 아니라 산상수훈 등 과격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종말론적 왕국의 실현에 관심하였던 것이다. 이런 종말론적 왕국에 근거한 뮌처는 인간의 평등과 재사의 공유와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의 모형으로써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생각하였다.
결국 그런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로마교황과 봉건제후들이 그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천년왕국사상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는 당시 사회체제의 변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농민전쟁을 계기로 루터의 교회론은 국가의 공직자들과 결탁하는 국가교회의 방향으로 나갔으며 그 국가교회는 세속 권력자인 제후의 손에 들어갔다고 비판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루터가 교회의 개혁에만 국한되었던 것에 반해, 토마스 뮌처는 사회적인 개혁에 까지 그의 개혁의 범위를 넓혔음을 많은 사학자들은 평가하고 있다.

멘노 시몬스의 종교개혁

  16세기 종교개혁기가 얻어낸 인물인 멘스 시몬스는 교회사에서 그렇게 뛰어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나 주목할만한 인물이다. 그는 재세례파가 상당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나타난 인물이다. 멘노 시몬스는 1496년 경 네덜란드 프리슬란드 주 비트마르숨에서 태어났다. 그도 다른 개혁자들과 같이 신부가 될 결심으로 공부하고, 1524년 경 그의 나이 28세 되었을 때에 신부가 되었다.
 그런데 1531년 멘노시 중심가에서 어떤 신자가 재세례파의 세례를 받았다는 죄목으로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장면을 그가 목격한 것이다. 시몬스는 놀랐다. 재세례파에 대해서 그도 어느 만큼은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재세례파의 세례를 받았다는 죄가 죽어야 할 죄인가 하고 크게 놀랐다. 시몬스는 그때로부터 유아세례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 이번에는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었다. 1535년 뮌스터 재세례파 신자들 400여 명이 시몬스의 집 근처에 있는 수도원에 피하여 있다가 집단 학살당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때 멘노 시몬스의 형도 재세례파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하다가 희생되었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같은 개혁파 신자들끼리 죽이고 또 죽는 일, 이 일을 어떻게 정당화 시킨단 말인가. 시몬스는 로마교회 못지않게 프로테스탄트들이 큰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더욱 열심히 연구를 거듭한 끝에 로마교회의 교리적인 모순을 깨닫고 종교개혁에 대한 확신에 불타고 있었다.
 그는 결국 로마교회의 옷을 벗었다. 1536년 그가 40세 되던 때에 그는 로마 교회와 결별하였다.
 그는 개혁자들의 사상을 또 연구했다. 로마교회 뿐 아니라 루터나 칼빈, 츠빙글리에게도 과오가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가운데 그래도 재세례파의 교리가 진리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멘노는 1537년 경 재세례파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저명한 재세례파 평신도인 옵베 필립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에게 세례를 집례한 옵베 필립에게 안수를 받고 교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멘노는 북부 독일과 네덜란드의 재세례파 부흥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그는 이미 지리멸렬해 버린 재세례파를 어떻게 일으켜야 하는가, 하는 중대한 시련에 봉착한다.
 그는 열심과 굳센 결의로 재세례파의 중흥을 목표하고 일어났다. 재세례파운동의 장점은 보존하고 잘못된 부분은 버려야 하는 일, 그리고 흩어진 재세례파 신자들을 다시 모아서 한 단체로 만들어야 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나 시몬스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부로부터 위협을 받고 급기야는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멘노 시몬스는 전도활동의 시작 때부터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심한 어려움과 생명의 위험이 떠날 때가 없었다고 말한다.
 순수 재세례파들이 모두 그러했지만 멘노 시몬스는 재세례파의 중흥 인물로 또는 그 관리자로서의 생애를 살면서 순수한 신앙, 고결한 교회를 지키기에 성공했다. 시몬스는 16세기 종교개혁자 중에 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결코 그는 루터나 칼빈, 츠빙글리, 존 녹스 등 국교회 창설자들의 활동과는 비교가 안될만큼 어려운 조건에서 종교개혁을 시도했다.
 재세례파나 멘노 시몬스의 입장에서 볼 때, 루터나 칼빈 그리고 존 녹스는 세속국가의 협력을 받으며 또 그들에게 유익을 나누어 주면서 일종의 동맹관계를 가지고 활동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멘노 시몬스의 재세례파는 세속국가의 힘을 빌리기는커녕 그들의 혹독한 박해를 받으며, 또 로마교회나 다른 프로테스탄트로부터 박해와 학살을 당하면서 일해야 하는 3중 핍박 속에서 개혁운동이었다.
 또 하나 중요한 멘노의 재세례파 신앙정신은 “평민적 자유”다. 이 부분은 루터가 그의 개혁 초기에 내세웠다가 후퇴한 “만인 제사장” 사상과 유사한 것이다. 루터의 “만인 제사장” 곧, 모든 신자는 교황이나 신부, 목사의 도움 없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 부분에서 루터는 독일 농민전쟁의 벽에 부딪혔고 재세례파의 도전은 바로 그 농민전쟁을 통해 하층계급의 사람들 편에서 길을 얻었다.
 평민적 자유란 교회가 성직자와 평신도로 나누어지는 계급적 대립이거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제, 신부·목사가 개입할 필요 없는 시대를 예감하는 통찰력에서 나온 것이다. 목사나 신부가 아닌 재세례파 신자 옵베 필립에게 세례를 받았고 또 안수를 받았다는 내용에서 현명한 재세례파의 성격의 기본을 엿볼 수 있다.
 그들은 교회가 쥐고 있는 하나님의 권세를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하며, 교회는 하나님 안에서 평민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을 했다. 시몬스의 재세례파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단순한 복음 진리로서 저들의 조직과 신학으로 삼았으며 저들에게 있어 모든 성도들의 관계는 평등한 것으로 ‘형제’였기 때문이다.
 멘노 시몬스는 혁명적 재세례파가 저질렀던 과오를 씻어내기에 충분한 활동을 했으며, 또 그는 1527년 순교자 회의라고 할 수 있는 저들 재세례파 총회에서 수립한 “일곱가지 신조” 중에서 특별한 하나, 중요한 부분에 더 충실했다. 그것은 비폭력, 곧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인은 칼을 써서는 안되며 정치에 관여해서도 안된다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칼을 쓰는 자 칼로 망한다” 하셨던 말씀을 생각하고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라는 노래를 불렀던 이사야서 2장 4절을 생각하면서 재세례파는 칼 앞에서 자기의 목숨(들)을 기꺼이 내놓고 오직 사랑의 방법으로 원수를 대했으며 오직 복음 진리로서 죄악과 싸웠다.
 칼이 필요 없이 이 세상을 산다, 칼이 필요 없이 칼을 이긴다, 칼이 필요 없이 나를 지킨다. 이 부분은 여러 문제를 낳게 되는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다. 공산당이 쳐들어오는데 맨 몸으로 막아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고 국가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살아남기 위하여 칼이 없이도 되는가에 대한 해답은 무엇일까. 단순히 정말 칼이 필요 없냐고 말하기 전에 저들이 칼을 필요로 하지 않는 도덕적 수준에 있음을 살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끝으로 멘노 시몬스와 재세례파가 주장한 모든 백성의 재산 공유화에 대한 부분이다. 저희가 모든 신자들의 재산을 공유화 하는 이상에 도전했다는 사실에 우리는 일단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회 초기에 있었던 성도들의 공동체를 본받고자 하는 재세례파의 이상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양승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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