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뇽 교황청 시절이 끝난 후, 유럽은 새로운 질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구나 르네상스의 버림은 교회권과 지상국가 권력사이에 범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고 본다. 중세교회의 위세가 꺾인다. 제국이 해체되고 교황권이 아비뇽 망신을 당한 후, 인간주의가 힘을 얻는다. 인간주의, 곧 르네상스의 주요인물은 페트라르크(petrarch)이다. 아비뇽 성직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진정한 목표를 라틴문학의 부활이었다. 그는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경멸했다. 오히려 그는 키케로를 존경했다. 페트라르크 숭배자요 또 그의 제자인 보카치오(Boccaccio)는 그의 데카메론(Decameron)으로 유명하고 헬라어 연구를 장려하고 고전과 신화의 신비를 파고들어 플로렌스와 나폴리에서 인문주의 연구를 장려하고 시대의 안목을 넓혔다. 역사는 밝아온다. 역사비판이 강화되면서 `콘스탄틴 증여 문서'가 위조임이 발각되었다. 교황권이 도덕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또한 사도신경이 사도들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 아님도 드러났다. 이를 위해 공헌한 인물은 발라(Lorenzo Valla)였다. 그는 또 수도자의 서약의 정당성을 비평하고 1444년 불가타와 헬라어 성서를 비교하여 신약성경연구의 기초를 세웠다. 1450년 르네상스의 또 하나의 별이 떴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이다. 르네상스 뿐 아니라 루터의 종교개혁이 성공하게 되는 중요 변수였다. 이는 이제까지 손으로 쓰던 성경책이나 주요 문서들이 활자인쇄를 하게 되어 그 제작 속도를 크게 향상시켰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각 민족들의 자각을 불렀다. 1450년에서 1500년 사이에 눈부신 변화를 가져왔다. 영국과 오랜 전쟁으로 거의 파멸지경까지 갔던 프랑스는 1339년∼1453년 사이에 강한 군주국가로 발전하였다. 영·불 전쟁 동안에 봉건 귀족들이 대부분 몰락하면서 군주국가가 강화되었다. 루이 Ⅸ세는 유모, 군대, 학정과 평민들이 도움으로 봉건귀족의 권력을 격파했다. 그리고 왕권을 크게 강화시켰다. 그의 아들 찰스Ⅷ세는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침공하여 유럽정치사의 신기원을 일구어 냈다. 교회는 차츰 교황권에서 벗어나 강화된 왕들의 세력 안으로 들어갔다. 영국의 경우를 보라. 헨리Ⅷ세의 경우 외형상 그의 결혼문제로 교황과 다투지만 그보다 먼저 왕들의 지상권 강화가 부른 영국 교회의 독립이기도 하다. 민족들의 강화를 획득한 나라중 스페인이 가장 실목을 차렸다. 스페인은 늦은 라틴세력이다. 줄리어스 시저의 원정에 의해 로마의 영토가 된후 충직한 로마의 길을 걸었고, 교회사에 의하면 주요 황제나 크게 이름을 떨친 교황들이 많이 나왔지만 그들은 AD 711년 베르베르족의 이슬람 세력에게 국토의 주요부분을 침략 당하고 심각할 때는 전 국토가 이슬람화 될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지혜로웠다. 소위 데콩키스타, 다시 말하면 잃은 땅 되찾기 운동을 지속적으로 시도하여 1499년까지 남부 그라나다에 남아있던 이슬람 세력을 추방한다. 교회의 입장도 강화된다. 1502년부터 헬라어와 라틴어 대조를 끝낸 소위 알칼라 대조성경(Complutensian polyglot, Alcala Complutum)이 1517년까지 제작완료를 한다. 스페인은 르네상스의 유명인물인 에라스무스의 도움을 받으며, 로마 가톨릭을 강화시킨다고는 하지만 자민족의 세력 강화를 이루어 낸다. 독일의 경우,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한다. 황제의 관이 있기는 했으나 1438년∼1740년까지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家)의 금관이었으며, 봉건사회를 극복 못한 저들에게 강력한 국가는 미래의 꿈일 뿐, 바로 여기 이같은 독일의 분위기에서 마틴 루터의 개혁이 가능했을까. 조효근/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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