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그의 지체인데, 그래서 교회는 그의 몸이어야 하는데 몸은 커녕 오리가리 찢어져 있다. 더군다나 한국교회의 용서받을 수 없는 행태중 하나가 아주 내어놓고 `목회의 성공'이니 `실패'니 하는 말을 뻐젓이 해대는 것이다.
더욱 해괴스러운 것은 한국교회가 `목회성공'이라 할때 그 성공이란 것은 철저하게 반성서적인 경우들이다. 인생의 도상에 천하무익한 것들로 버려졌던 생명들이 새삶의 주체로 변화되는 경우가 결코 아닌 `수량의 확대'들 말이다.
그러나 이제에 이르러 그 수량의 확대는 `엘리의 비둔'(삼상 4:18)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일찍이 역사의 사람 함석헌은 이렇게 말했다. “일제시대 별로 한 것도 없이 법에 끌려갔던 일이 있는데 그 조사하는 첫말이 놀라왔다. 왈, `너희놈들 인생의 종교를 믿고 있다면야 누가 잡아오겠느냐? 종교라는 이름아래 독립운동 하니 잡아왔지” 했다. 나는 속으로 `그럼 나도 낙제는 면했나보다'라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을 지금도 잊지않고 있다. 그러나 생각해봐! 민족을 온통 먹어버리자는 그 압박정치에서 선량한 종교로 인정받는 것이 그래 옳은 산 종교일 수 있는가? 어찌 일본사람이라면 악이라 하면서 우리나라 정권이 하면 아니라 할 수 있는가? 만일 마찬가지로(일본이나 대한이나·필자주) 악이라 할진데 어찌 그때에는 의무를 다한 것이라 하면서 이때는 아니라 할 수 있는가?(전집 3·8)”.
함석헌의 한국교회를 향해 왜 `이때는' 그 의무를 다하지 않는가고 탄(歎)한 그 `이때'란 박정희의 군사폭동 이후 함석헌이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의 군부정치 시대를 말하는데 씨알사상의 창도자(?)인 함석헌의 눈에 보이는 한국교회란 `하나님의 역사'의 반동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우선 한국교회가 목놓아 울고 또 울어 속함받아야 할 죄가 있다. 한국교회를 세계의 어느 교회, 어느 성전, 어느 사찰보다도 극심한 자본주의 세력으로 만들어 버린 죄이다. 씨도 남기지 말라하신 바알, 바알주의를 오히려 신으로 모셔버린(?) 죄 말이다.
역사의 사람 함석헌이 죽기로 대적하여 싸웠던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의 폭압, 한국교회는 그 군부세력의 첩실(妾室)역할을 맘 내놓고 해댔다. 그렇게해서 한국교회는 철저한 탈역사로 `대형화'라는 선물(?)을 얻었고, 드디어 한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그것이 인생의 교리(敎理)라며 민중들에게 가죽옷을 입혀 버렸다.
함석헌은 그가 태어난 마을에 8대성이 있었는데 그 성씨중 부자집들은 `종'이라는 것을 부리고 있었는데 자기집은 종이라는 것이 없었다면서 `그것만은 참 큰 은혜였다'고 고백하고 있다(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p.36·삼중당).
작은놈, 큰놈이 따로 없는 하늘이 낸 한 생명이있을뿐 인종에 다른 씨는 없다는 공존의 이상! 함석헌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정말 하늘사람이었다. 1901년 태생인 그는 1919년 열아홉 되는 해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화근이 되어 평양고보 3년에 제적이 된다. 잘못했다는 각서 하나 써내면 복학시켜 준다는 걸 `내 나라 독립 위한 운동을 어떻게 잘못이라 할 수 있느냐'며 영원히 제적생이 되는데 함석헌은 이때부터 `관(官·권력·필자주)과는 원수가 됐다' 했다.
함석헌의 `관과 원수가 됐다'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된다. 처절히, 철저히 민중으로 살기로 했다는 말이다. 함석헌은 소위 한국교회와는 정반의 길을 걸었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나는 실패하기 위해 온 사람'이라고. `믿기만하라 능치못함이 없다'라며 핏대 올리는 한국의 대교회 목사들과 얼마나 다른가? 필자는 함석헌을 통해 이미 죽어버린 한국교회를 본다. 필자는 함석헌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으로 다시 살아날 한국교회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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