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7:8∼16, 행 23:12∼35, 눅 7:1∼10

호세아시대 북왕국 이스라엘은 온 나라가 바알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나라의 기강이 무너졌습니다. 정의가 사라졌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착취는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밖에서는 앗시리아와 이집트가 세력 다툼을 하는 가운데 권력층과 부자들은 어느 쪽에 의탁해야 살아남나 하는 생각만 했습니다. 호세아는 당시 상황을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뒤집지 않은 전병', `어리석은 비둘기'라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제 안일만 구하는 사람들의 생리는 비슷합니다. 그들은 항상 권력의 향배에 민감하고, 외세의 변화에 민감합니다. 요즘 나라의 엘리트들이 미국에 충성을 바치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저 옛날 에브라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나라의 엘리트들을 향해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 7:14)'라고 질타합니다.

나라가 위기라면서 침상에서까지 하나님을 찾기는 하는데, 그 마음은 곡식과 새 포도주만을 좇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바알 숭배의 전형입니다. 하나님을 잇속 챙기는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바알숭배입니다.

누가가 증언하는 백부장의 이야기는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근원적 성찰의 빛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백부장은 로마 군인으로서, 식민의 주둔군의 지휘관으로서, 민사와 치안을 담당한 사람입니다. 자기 명성과 부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착취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병든 종을 위해 자기를 취했습니다.

타자를 위해 자기를 취하는 것이 바로 자기 희생이고, 예수께서 살아가신 삶의 방식입니다. 예수께서 백부장을 향해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극찬하신 이유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종을 위해 자신을 취한 그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적의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와는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애쓰는데, 로마의 백부장, 천부장, 심지어 총독까지 나서서 바울을 살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자기들과 이해를 달리하는 동족 하나 죽이기 위해 집단적인 히스테리에 빠진 것입니다.

종교가 썩으면 이렇게 됩니다. 나라의 엘리트들이 부패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라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자기 자신을 취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취하려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으며, 기적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성서는 오랜 역사를 통해 선진국에 대한 이상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비록 상세한 계획서는 아닐지라도,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살 권리와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입니다. 안식일, 안식년, 희년의 법들은 이런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제정한 것입니다.

성서가 이방 종교, 이방 문화와 치열하게 싸운 것은 소수의 엘리트만이 잘 살며 사회적인 약자를 억압하고 가난한 자를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 지도자들과 엘리트들이 성서가 지향하는 선진국에 대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들이 일심으로 주창하는 선진국은 이방 나라들이 말하는 선진국과 다른 바 없습니다. 이런 나라는 경제 지표가 올라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소수의 사람들이 잘 사는 선진국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이 잘 사는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잘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그런 나라를 위해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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