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떠 있는 구름 속에 작은 물방울들, 모이고 모여서 빗줄기가 됩니다. 하늘의 비는 높은 산과 호수, 메마른 땅에도 내립니다. 물이 있는 곳이나 물이 없는 곳이나 가리지 않고 물을 나누어 줍니다.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는 까닭은 하늘에서 나누어준 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해방의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홍해 바다 앞에서 죽음을 걱정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앞에서는 넘실거리는 바닷물이 길을 가로막고, 뒤에서는 이집트 군인들의 칼이 목숨을 노립니다. 그러나 물은 이집트 군사들에게는 죽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가는 길은 머나먼 길입니다. 홍해의 기적에서 해방의 기쁨을 맛보는 것도 한 순간, 사흘 길을 지나도록 마실 물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마라에서 찾은 물은 마실 수 없는 쓰디쓴 물이었습니다. 보이지 않던 물방울 속에 일곱 색깔을 지닌 무지개가 숨어있듯이 쓰디쓴 마라의 물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한 그루의 나무는 쓴 물 속에 숨어있는 단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쓰디쓴 인생의 강물에도 단물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서 순종하고, 그 명령을 귀에 담아 잘 실천하면,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목마름의 고비를 넘긴 이스라엘 백성 앞에 굶주림의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마름과 굶주림,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들입니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하나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왜 이곳까지 와서 죽어야 하는가? 비록 노예로 살았지만, 고기 가마 옆에서 빵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 않는가? 모세는 우리를 광야로 끌고 와서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불평은 인생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고통에 불평을 더하면 불평한 만큼 고통이 커집니다. 고통에 감사를 더하면 고통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산마루를 지나면 골짜기를 만납니다. 따가운 햇살로 누렇게 타버린 사막 한 가운데도 녹색의 나무들이 자라는 오아시스가 있습니다.

동전이 땅 위에 떨어졌습니다. 앞쪽이 나왔을까요? 뒤쪽이 나왔을까요? 그 확률은 각각 50%입니다. 그러나 앞쪽이든 뒤쪽이든 동전의 값어치는 그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 이르기 전 신 광야에서 굶주림의 쓴 맛을 겪어야 했습니다. 눈앞에는 굶주림으로 찾아올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머리 위에는 하나님의 손길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내려 줄 터이니, 너희들은 하루에 하루치만 거두어라. 그러나 여섯째 날에는 이틀치를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굶주리고 있는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내주셨습니다. 이와 함께 안식의 의미를 다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하루를 쉰다는 것은 힘들게 지켜야 하는 계율이 아니라 한 주간의 삶에서 하루를 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하루를 쉬라고 명령하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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