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일의 기억을 더듬어 보니, 시계바늘이 중학교 2학년 때에 멈춘다. 독서모임에서 일 년에 한 번 문집을 냈다. 요즘 많은 분들께는 생소할 `가리방'이란 철판에 파라핀 종이를 올려놓고 철필로 써(긁어)가며 원고를 `입력'했다. 철필이나 안 나오는 볼펜으로 쓸 때 `가리가리'(우리말에 없는, 일본어 의성어다) 하고 소리가 난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던가.

당시 `편집진'으로 모인 까까머리 소년들은 원고 모아서 가편집하고 교정 교열에 입력, 수정 그리고 간간이 삽화도 직접 그려 넣었다. 나중에 등사해서 나온 종이를 일일이 접어서 한데 모아 끈으로 묶고 제본까지 했으니, 요즘으로 치면 인쇄 외의 모든 일을 편집자들이 소화해 낸 셈이다(자장면 먹으며 우리끼리 `출판기념회'도 했다!). 세월이 흐른 뒤에 들여다볼라치면 참 유치하고 어설프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나름 고민하며 생각을 나누고 모은 결과물이었다.

영인본 출간을 앞두고 있는 〈게자씨〉를 마주하며 잠시 옛 생각을 했다. 1931∼1932년 평양에서 간행된 신앙잡지 〈게자씨〉를 모은 것이다. 호당 10∼20쪽 안팎의 이 잡지엔 시론(時論)적인 성격의 글과 성서 이야기, 일상의 여러 문제들을 기독교의 관점에서 돌아보는 글 등이 실려 있는데, 험난하던 시절 신앙 선배들의 믿음의 자취가 오롯이 담겨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넘기다 보면, `가리가리' 소리를 내며 철필로 원고를 긁었을 편집자 분들의 숨결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80여 년 세월의 간극이 갑자기 없어지는 느낌이다.

판권 페이지의 `편집자 후기'를 읽으며 잠시 숨을 돌린다. 납량(納쪱)이나 성탄 특집 증면호임을 알리는 문구는 요즘과 비슷하다. 원고 투고를 요청하며 시절 인사도 살뜰히 곁들였다. 문득 시선이 멈춘다. 원고 검열 지연으로 발간이 늦어진 데 대한 사과 문구와 부득이한 사정으로 출판하지 못하게 된 과월호에 대한 양해를 구하는 문구다. 아아, 이분들의 작업이야말로 시대의 질곡과 치열하게 맞서 싸우며 자신을 던진 문서 선교였던 것이다.

영인본이 지니는 자료적 가치의 소중함을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으랴. 필자가 책 만드는 일을 해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들 중 하나는 수많은 의궤(儀軌)와 우리 옛 지도를 접한 것이다.

조선 중기에서 후기에 제작되어 전해오다 영인본으로 다시 태어난 이들 자료를 통해 나는 비로소 기록 문화의 소중함에 새로이 눈뜰 수 있었다. 방대한 양의 정보를 모아 놓은 것도 그렇거니와, 모으고 엮어낸 이들의 기록 정신이 자못 놀랍고 우리를 숙연하게까지 한다.

디지털 시대, 글로벌 시대의 첨단을 향해 무한질주하고 있지만 정작 소중한 자료들을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하는 우리네 `마인드'는 저 `가리방 세대', 아니 목판 활자 세대에도 못 미치는 것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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