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아시아시대 〉7〈


     터키 아라랏산 인근에서 양을 안고 양들을 치고 있는 목자.

에뎃사는 아시아로 가는 복음의 출발지가 되고 수리아 안디옥은 유럽으로 가는 복음의 출발지로 정리하면 단순한 방향정리는 된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기에는 부담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복음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오순절 성령강림(행 2:1∼) 이후 하나님의 직접 감독으로 복음은 예루살렘, 사마리아, 이두메, 갈릴리 북방인 두로와시돈 등지, 그리고 다마스커스는 바울의 복음운동 완성지를 겸하고 있으며 동쪽방향으로는 에뎃사가 관심지대로 떠올랐다.

하지만 기독교의 초기 중심은 바울의 다마스커스의 개종, 안디옥(수리아) 선교운동의 출발을 통하여 직계 제자도 되지 못한 그가 기독교 안에서는 결정적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약성경을 구성하는 27권 중 13권(직필 6권, 대필 7권)이 바울의 집필분량이다. 이를 기독교는 계시의 부분으로 정했다.

이에 비하여 에뎃사를 중심한 아시아 방향의 복음은 후발 성격으로 밀려난 것은 아니었으나 페르시아 권 선교의 갈등으로 지속적이고 구체적 활동에 있어서 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기독교가 선택한 인물의 결과라기 보다는 복음의 정통성에 있어서의 구분으로 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는 율법학자 사울이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서 응징하기 위하여 수리아지역 다마스커스 성문 어구에서 진귀한 경험을 하는 것을 본다(행 9장).

그날 이후 그는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꾼다. 그리고 AD 47년 친구 바나바와 함께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구브로(키프러스)를 향하여 제1차 세계 선교를 떠났다. 그는 1차, 2차, 3차, 4차까지 지속적인 선교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며, 선교의 열매로 터키반도와 그리스 등지에 확고한 기반을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이베리아 해를 따라 에스파냐 선교포부를 가졌으나 그는 로마 선교를 끝으로 자기 인생을 마무리 했다.

사도 바울로 호칭하는 그는 제2차 선교여행 중 `아시아로 가고 싶다'(행 16:6)는 열망을 가졌으나 그의 주인되신 성령 하나님의 허락을 받지 못해서 아시아행의 뜻을 접어야 했다.

바울의 아시아행 포부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 우리는 에뎃사를 주목하게 된다. 물론, 바울의 아시아는 일차로 에베소가 되겠으나 터키 동부지역 중간에 위치한 에뎃사 또한 먼곳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북방을 향하여 머리를 들면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터키의 중부가 된다.

바울의 아시아행을 막으시는 하나님의 이유가 에뎃사와 관계가 있을 것 같다. 더 정확하게는 아시아 선교와 관계가 있을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앞서도 부분적으로 밝힌 바 있는 필자의 조심스러운 견해는 솔직하게 말해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기독교와 결별하고(AD 431년) 아시아 선교를 위하여 에뎃사 집결(AD 451)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으면 한다. 물론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이전에도 아시아 선교기반은 넉넉했다. 아르메니아 기독교, 앗수리아 기독교, 페르시아 본토 기독교가 있다.

그러나 아시아 기독교는 영지주의파와 에비온파 등의 비정통 기독교의 영향권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기독교의 본 모습은 예수께서 `세상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와 `그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 16장 참조)에 대한 답변을 요구 받고 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의 모범과 함께 기독교는 제1차 AD 325년 니케아 세계회의에서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시다'에 동의하였다. 이에 대한 시비는 제4차 칼게돈회의에서 다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니케아 회의에 참여한 318명의 대의원 자격의 감독들은 18명 뿐인 아리우스를 위시한 무리들을 제외하고는 메시아 예수의 `양성론'에 동의하였다. 신성과 인성의 양성을 가졌으나 두 본성은 일치(호모우시오스)한다고 니케아 신조기록으로 남겼다.

이들 니케아 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바울시대, 그의 3차 전도여행시 바울은 수리아 안디옥 교회가 유대교의 한 분파로 자처한 예루살렘 교회(감독 야곱)의 유혹에 빠져서 예루살렘파로 돌아가자 안디옥교회와 결별했다. 3차 전도 이후 바울사도가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 하는 유대교식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신학사상을 용납하지 않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시아 교회의 대표성을 말하고 있는 로마파 기독교에 대한 분류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이는 한국교회에서 유난히 로마기독교에 대한 열심을 가진 이들이 많아서 더더욱 그렇다. 사도 로마 이야기를 쓴 정학봉 교수는 그의 책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AD 367년에 알렉산드리아의 열정적인 주교였던 아타나시우스(Athanasious, AD 296∼372)가 부활절 메시지에서 자기들이 좋아했던 서적들 외에는 모두 파기할 것을 이집트의 수도사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성 파코미우스 수도원(Monastery of st. Pachomius) 수도사들은 서고에서 그것들을 꺼내서 여섯자나 되는 큰 항아리속에 넣어서 밀봉하여 가까운 나그 하마디(Nag Hammadi) 언덕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약 1600년 후인 1945년 12월에 이집트 시골 농부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에 의해서 우연히 발견되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 버렸을 소중한 자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중에 도마 복음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마 복음서'아니라 바울 복음서라고 해도 당시 아타나시우스 감독의 신앙기준에 대한 신뢰를 먼저 해야 할 것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니케아회의 때부터 신학적 정통성을 확보한 정통기독교, 즉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 양성 일치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었다. 그가 폐기를 요구한 책들은 검증이 끝났음을 우리는 신뢰한다.

그리고, 아시아 기독교가 과연 신학적 정통성과 보편성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한 검증을 하면서 우리는 역사 속의 유라시아 기독교를 살펴갈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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