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아시아시대 〉14〈


        회족 무슬림과 다정한 시간을 갖는 필자.

기독교 역사, 지나온 시간들을 되살펴 보면 양성론(神人兩性論)이냐 단성론(單性論)이냐의 시비의 연속이었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나누던 대화중에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마 16:13)에서 비롯된 `예수의 성격' 또는 `그 분의 존재 근거'에 대한 의문이 발생했다. 예수께서 세상 인심을 알고 싶어서 하신 말씀이 아닌데 제자들과의 대화는 중간에 차단되고 만다. 처음에는 그런대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예수에 대한 평가를 할 때에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아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더이다'(마 16:14)라고 예수께 전했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의 답변을 더 듣고자 하였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실 때 베드로가 나섰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로 답변을 하였다. 이에 예수께서는 매우 만족해 하면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셨다. 어디 그 뿐인가.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다.

대단한 파격이었다. `너는 베드로'라 하시며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 하셨으니 매우 구체적인 말씀이고, 특정인에게 편중된 듯한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천국)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정도가 아닌 이상 어느 개인에게 천국열쇠를 준다는 표현은 거북스러웠다.

그럼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자에게 `천국열쇠' 곧, 그가 천국에 들어갈 열쇠를 준다는 뜻이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자를 선택하는 감독관의 자격을 준다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천국열쇠가 하나인지 여러개인지, 열쇠 책임자가 한사람인지 저마다 천국의 해당자이면 그 인격 자체가 천국열쇠가 되는 것인지는 일단 뒤로 미루고 열쇠를 얻은 베드로에게 일어난 문제를 살펴보자.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 신분을 완전히 공개하신 후 제자들의 수준을 믿고, 장차 예루살렘에서 겪을 수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말씀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절대불가'를 선언했다. 어떤 경우에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예수께 단단히 항변을 했다.

그 지경이 되자 예수께서는 사정을 두지않고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하였으니 천국열쇠를 책임지는 대표권은 커녕 그 자신의 천국행 마저도 당시로서는 문제로 등장한 베드로의 처지였다.

여기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양성론과 단성론의 관계를 뚜렷히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예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부터 정리해 가자. 세상 사람들은 예수에 대한 이해가 단순한 선지자 또는 예언자로 알고 있을 때 제자를 대표하여 말한 베드로의 `그리스도론'이 등장한다.

더 분명한 표현은 요한복음 1장 18, 27, 29, 31절에서처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또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표현이 메시아 예수의 `대속론'이 나오고, 대속론의 수행자는 독생하신 하나님 자신임을 말하기 때문에 세상에 오신 예수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모습, 그 자신이며 그는 더 정확하게는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고 사람의 몸을 지녔으나 하나님 자신이심을 명백하게 증거하고 있다.

기독교의 본 모습, 정형, 정통으로는 양성론, 곧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자신을 하나님과의 본성의 일치로 보고 있다.

현재 세계 기독교의 분포는 양성론과 단성론, 두 개의 형식교회를 중심하여 기독교가 형성되어 있다. 바울 사도가 `정통 기독론' 원형을 제시한다. `아리우스'라는 알렉산드리아 오리겐의 영향을 받은 단성론자가 3세기에 등장하여 기독교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이에 AD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를 열어 어느만큼 정돈했다. 그리고 로마제국과 유럽은 프랑크 왕국이 기독교의 도움으로 아리우스파의 단성론을 추방했다. 그러나 아시아 기독교는 바울사도 만큼한 이론 신학자가 없어서 단성론 기독교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AD 451년부터는 네스토리우스가 로마제국 교회로부터 정치적 패배를 한 후로 아시아 선교의 방향을 잡아갔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의 영향력이 차단되기도 했다.

네스토리우스는 AD 428년 안디옥 교구장에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된 후 로마제국 교회의 절반은 책임질만큼 큰 세력의 맹주였으나 AD 431년 에베소 종교회의의 파행과 함께 매우 부당한 이유로 이단이 되어 사막에 유배되었다.

그의 뜻을 따르는 제자들이 에뎃사(현 터키의 산 우르파)에 모여 페르시아(아시아)행을 결단하고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중국 등 거대한 선교 무대를 얻었으나 안타깝게도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이 가는 길에는 교묘한 단성론자들, 마니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 힌두, 불교, 도교 등 현란한 종교철학을 가진 자들이 길을 막게 되어 네스토리안들은 그들의 순수를 지켜내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도마의 기독교를 비롯하여 범 앗수리안들이 광할한 아시아 변방들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네스토리안들은 차츰 양성론 기독교의 교리적 특성을 잃어가는 이유가 될수도 있었겠다.

여기, 이 부분에서는 교묘한 전략에 말려드는 듯한 느낌까지 들게 된다. 원치않게 로마의 선교영토에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로마교회의 저주를 받았으나 아시아 교회가 받아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니 아시아 기독교의 단성론파 특성의 기독교 분위기에서 자기네 본래의 특성을 강하게 고집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필자는 지난 1월, 미국 시카고 앗수리안과 네스토리안의 연합교단을 찾아갔었다. 나는 그 교단 총회장 호머 앗수리안에게 `네스토리우스파가 언제 앗수리아교단과 합류했느냐'고 물었더니 호머 앗수리안은 말하기를 `우리는 본디 하나였다'라는 답변을 했다.

나는 그 순간, 아하! 앗수리안 기독교는 네스토리우스가 에뎃사 출신이라고 해서 네스토리우스 신학사상을 자기네 신학전통과 일치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난 7월 중국 우르무치 사범대 부총장 우여극 박사와 대화 도중 내가 `네스토리우스파(경교) 기독교가 당나라에서 왜 그렇게 쉽게 힘을 잃었겠느냐'고 물으니 우 박사는 `정치에 너무 깊이 간여했지요'라고 단정적 표현을 하지 않겠는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중국(당나라)에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단성론파와 양성론파로 나뉜 두 세력이 활동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당나라 정치세력과 어울린 사람들은 분명, 양성론파였을 것이며 그들은 콘스탄티노플 출신 네스토리우스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이 부분은 다음 호에 설명).〈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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