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함석헌 선생의 자택 서재에서 필자


'참'을 찾는 학동(學童)

함석헌의 20세 이전, 청소년기의 마지막 `참의 순례'는 3·1운동이다. 소위 위대한 저술가, 종교가, 언론인, 사상가로 보다도 세상에 왔다가 돌아가기까지 그의 삶의 여정을 오직 하나, `참의 순례'로 결정지으신 그의 하나님은 10대의 마지막 순례로 3·1운동을 준비하셨다. 함석헌에게 있어 3·1운동은 애국운동도 독립운동도 심지어는 민족운동까지도 아니었다. 시종일관, 철두철미 함석헌의 3·1운동은 “참의 운동”이었다. 이것이 함석헌의 신비(神찅)이다. 물론 “3·1운동까지도 함석헌에겐 민족도, 애국도, 독립도 아닌 참의 싸움이었다는 것을 실제로 그같은 국가적인 것들, 민족적인 것들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그 악랄한 일본의 철권 폭압정치와 싸울 때 함석헌이 민족을 불사체로 절규했다는 사실은 그가 한민족·한국사를 얼마나 사랑한 사람이었던가를 증언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가 전해주는 그의 3·1운동의 증언들은 그 증언을 듣는 자들로, 읽는 자들로 만감이 교차케 한다.

“…1919년 만세를 부르는 그해 석은이형(咸錫殷·함석헌의 사촌형)이 평양으로(숭실학교 교사) 왔다. 그가 3·1운동때 평남북 학생운동을 맡은 관계로 자연평고(平高)에 있어서는 내가 연락을 하게 되었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와서는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1958)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그때처럼 상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타 마르도록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고 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꽂아 가지고 오는 일본군인과 마주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에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는 모른다.”

총에 칼을 꽂아 가지고 마주오는 일경과 뒤엉킨 소년 함석헌, 후에 함석헌은 그때의 3·1운동을 회생하며 “…하여간 나는 3·1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그것은 내 일생에 큰 돌아서는 점이 됐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 `큰 돌아서는 점'이라는 것이 뭐냐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 이후의 그의 증언을 주목한다. 그 이후의 증언이 그의 3·1운동을 단순한 애국운동이나 독립운동, 민족운동이라 할 수 없는 `참의 운동'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는 사실에서이다. 함석헌은 그 `큰 돌아서는 점'을 이렇게 말한다.

“만일 3·1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입학할 때의 생각 그대로 관립 평양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했을 것이요.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요. 의사가 됐다면 나도 지금쯤은 큼직한 병원이나 경영했을는지도 모르고 잘하면 나도 누구들처럼 국회의원에 출마했을런지도 모르고 누구 못지않는 자유당 중요 간부쯤도 됐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것은 그런것이 아니었다.”

그랬다! 함석헌의 유일한 관심사는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내게 명하신 것', 곧 함석헌에게 명하신 것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참을 찾음, 참의 순례였다는 것이다. 필자가 3·1운동을 함석헌 10대 청소년시절의 마지막 참의 순례였다고 말한 것이 이 때문이다.


'참'을 따르는 필연(必然)의 고난(苦難)


함석헌은 우주의 배후, 역사의 배후에서 우주사(宇宙史)를 이끄는 `절대의지(絶對意志)'를 하늘처럼 믿었다. 그리고 그 자신은 이 절대의지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Kicked by God)는 사실을 고백한다. 이 점에서 함석헌은 내촌이 뭐라거나 무교회주의가 뭐라거나 한국 기독교의 그 근본주의, 정통주의가 뭐라거나 영락(榮落)없는 기독교인이다.

물론 그 자신은 `나는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기독교인은 아니다'라고 단언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의 불후(不朽)의 역서(力書)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의 `성서적(聖書的)'이라는 표현을 후에 다시 낼때는 `뜻으로 본'이라고 고치는 대단한 변화를 보이기까지 했지만 함석헌 사상의 밑돌은 재언할 필요가 없는 성서이다. 어쨌든 함석헌은 그의 하나님에 의해 이제까지의 인생살이와는 전혀 딴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는 그 자신을 하나님의 발앞에 놓인 한 축구공으로 고백을 하면서 이제부터 자신의 진로는 그 분의 발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라 하는데, 그의 하나님이 그의 발뿌리에 놓인 그 공을 몰아가는 골(Goal)이 바로 `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에겐 참의 길, 참의 삶, 참의 싸움이 운명지워진 것이다. 되는 것, 안되는 것, 이기는 것, 지는 것, 사는 것, 죽는 것 까지도 그에겐 문제되지 않는다. 오직 한 길, 참이냐? 거짓이냐?만 묻게된다. 거짓과 강포가 꽉찬 땅에 참을 실현해야 한다. 불순과 불의, 거짓과 사악에 자신의 혈육(血肉)을 태우는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여기서 오는 것이 고난(苦難)인데, 함석헌은 이 고난을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라 하고 영광이라 한다! 이제부터 함석헌에겐 울어사는 삶이 시작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발길에 그렇게 차인 것을 감사함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3·1 만세운동이 끝난 후 한반의 친구들은 거의 다 복교를 했다. 다시는 그런짓(?)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였다. 그리하여 그대로 보통학교의 훈도가 되고, 군서기가 되고, 군수·경부가 되고, 의사·변호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 중학교 3학년 끝에 그 운동에 참여하고 난 함석헌은 집으로 돌아와야만 했고, 다시 학교엘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이미 `참의 영'에 사로잡혀 그 참의 영이 이끄시는 외에 다른 길로 갈수가 없었다. 그 하늘꿈의 아들 석헌이 집에 돌아와 마을 소학교의 선생노릇, 수리조합의 사무원 노릇을 하게 된다. 두해를 이렇게 지내게 되는데, 이같은 비극적 상황을 그로 하여금 극복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역사의 배후에 있는 절대 의지, 궁극적 실존에대한`처절한 신앙심'이었다.

정말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그 궁극적 실존의 뜻으로 읽어냈다는 것이야말로 그의 고백대로 더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함석헌은 자신앞에 놓이는 순간순간의 사건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로 살아냈다. 그리고 거기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이 고난(苦難)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함석헌은 무엇보다도 고난(苦難)에 깊은 이해를 지니게 된다. 평양고보에 갈 수 없었던 것은 재론한 필요가 없이 그의 `참'의 소명 때문이었다. 3·1운동은 정말 크게 옳은 일이었는데 다시는 그런짓(?) 않겠다는 것은 `참'을 버림이 된다. 참을 버린다? 그것은 함석헌에게는 자신의 삶(生)을 버리는 일이었다. 차라리 학교를 버리는 것이 옳았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것이 참이었기 때문에….

또 한가지 이유는 같은반에 `참'에서 함석헌 보다 한수 더 위의 학우가 있었는데, 그는 기타부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학교를 떠나버렸다. 그는 행방조차 알 수 없게 되었는데 그 친구는 함석헌으로 하여금 평고의 복고를 포기하게 하는 두번째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삶은 어떤 경우에도 현실인지라 소년 함석헌은 평안할 수 없었다. 그는 그때 평고에서 아예 제적이 되어 이후 두 해를 지내는 동안 `속이 썩을 대로 썩었다'고 술회하고 있다(전집 4권 210).

생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 이때다. 그는 3·1운동이 있기 2년전 그의 나이 열일곱 되던 해 부모가 시키는대로 자기보다 한살 아래인 `황부잣집' 딸과 결혼을 했는데, 결혼식 하는 날 함석헌은 학교만은 결석할 수 없다면서 기어히 학교를 다녀오는 정도였으니 그의 두 해 동안의 아픔이 얼마나 했겠는가를 상상할 수 있겠다.

이 두 해 동안 석헌은 잠자리에서 그 아내와 함께 셀 수 없을 만큼의 눈물의 밤을 보내야 했다. 참을 좇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였다. 삶의 의미를 찾아 운다는 것은, 보다 높은 깊은 넓은 삶을 찾아 운다는 것은 누구나 누릴수 있는 축복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높은 의미와 가치에 현상의 것들을 포기하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기 때문에.


아, 영복(永福)을 누릴 사람이여


그렇다면 함석헌이야말로 영복을 누릴 사람이었다. 생(生) 자체를 하늘의 영복으로 고백하는 함석헌에겐 `복'이라는 말 자체가 생소할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그런만큼 그는 또한 축복의 사람이어야 했다. 고난의 십자가가 영광의 십자가요, 고난의 사람이 영광의 메시야라면 더욱 그랬다. 십자가가 십자가로만 끝난다 해도 그것은 져야 할 것이지만, 으뜸이 될 수 없다 해도 섬기는 자의 삶은 살아야 할 것이지만 수용(自取)하는 싸움꾼들에게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영복을 주시는 바, 그것이 곧 자신이 당하는 그 고난의 의미를 반추(反芻)하는 것이요, 그래서 그 고난을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물론 불교, 유교, 회교, 인도교 할 것 없이 모든 참 종교는 이 축복의 약속을 메인 메시지(main message)로 전하고 있다. 함석헌은 젊다기 보다 어리디 어린 나이에 이 진리에 이르렀고, 적어도 이 고난의 의미, 고난의 역사에서의 첫사람으로 우리를 찾았고, 그렇게 우리 또한 그를 만나게 된다. 그저 참을 위해 참을 찾아 참을 찾는 것으로 전 존재(全存在)의 이유를 삼게 된 함석헌은 이제부터 소위 모든 `현상적인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그의 전집을 비롯한 여기저기 수많은 글에서 만나게 되는 `…하려다가 말고'라는 글들이 전하려는 메세지의 핵심은 바로 `자유하는 함석헌'이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노릇 못하고 나가선 국민노릇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라며 스스로를 자조(自嘲)하는(?) 함석헌은 아무것도 못한 실패자가 아니라 아무것에도 매일 수 없는, 아무것에도 매이지 않는 맨 사람, 알 사람, 얼 사람, 난데로의 사람, 본래대로의 사람, 사람으로만의 사람에 이른 것이다.

함석헌의 `씨알사상'에서는 무엇인가를 가진자 일수록 가난뱅이다. 맨사람 말고는 어떤 것도 얻어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상거지들이다. 함석헌은 죽어서도 말한다.

이 맨사람, 본래대로의 사람, 곧 씨이 역사의 주체라고 선언하면서 “맨 사람이여, 씨이여 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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