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는 역사-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아시아시대 〉18〈

                         
제2의 무함마드인가 싶은 유스프 하스 하지프. 사상가요 시인인 그와 영적 대화하는 필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 12:49∼50).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는 주 예수의 열망을 느낀다. 그의 가슴속, 그보다는 온 몸에 불타오르는 인류(만유)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함을 보게 된다. 바로 그의 심중을 표현하신 부분이 누가복음 12장 49절이다.

이 글을 읽을 때 처음에는 깜짝 놀랐던 경험이 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께서 방화범이 되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그 다음 50절을 읽으면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 그 세례 받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신다. 49절과 50절을 이어서 읽으니 주님의 심중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겠다.

이 세상이 하나님 사랑, 인간과 만물사랑으로 불타는 열정의 세계로 변하자면 `예수의 세례'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세례'는 곧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 받을 세례가 있다. 나 주의 영광을 위하여 골고다 제단에 이 몸을 갈기갈기 쪼개서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단호한 결의를 말씀하고 계신다.

주님의 결단은 현실로 다가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켜보는 사람들 중 일부는 의인이 억울하게 죽었다 했으며, 하늘의 하나님은 예수 십자가 제단의 희생을 받으시며 인류에게 속죄의 결단을 내리셨다.

십자가 예수의 죽음은 모리아산 언덕 이삭의 죽음을 유예하시고 수양을 제물로 받으신 날로부터 약 2천여 년의 기다림을 필요로 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 중 예수 십자가의 죽음을 자기 죄를 대신하는 죽음이요 자기와 함께 죽어주심의 장엄한 제단임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그들은 만세에 복이 있는 자들이다. 그러나 십자가 예수의 죽음은 단순한 예수 개인의 희생으로 보는 자유주의자들 또는 무신론자들에게는 한 순간의 감동으로 그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죽었다. 3일 만에 다시 사시고, 승천 후 성령 하나님의 자격으로 재강림하셔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를 긴장시키셨다.

예루살렘에 예수 공동체가 생겨났다. 사도들이 지도하며, 스데반 등이 실무를 담당하는 성숙한 공동체(교회)가 탄생했다. 공동체가 순조롭게 성장해 간다고 했는데 장애가 발생했다. 소장파 바리새인 지도자인 사울(후일에 바울)이 주축이 되어 공동체를 와해시켰다. 그리고 예수를 꼭 닮은 지도자 스데반을 죽여 버렸다.

스데반 순교를 신호로 이 땅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그 불길이 골고다에서 시작된다 했더니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스데반이 장렬하게 순교의 피를 뿌림과 동시에 시쳇말로 요원의 불길이 되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께서 벌떡 일어나셨다고 스데반이 증거하고 있다.


스데반을 죽인 자들이 흡혈귀들처럼, 늑대들처럼 덤벼드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사랑과 구원의 피를 뿌리는 기독교의 창조적 선교가 시작되었다.

사마리아, 아라비아, 다마스커스 등지로 핍박자들이 포위망을 형성하였다. 사랑하는 사람들, 예수가 아끼는 제자들이 죽어간다. 예수를 너무나 잘 닮았던 스데반을 앞장세운 초대교회의 순교열전을 헤아려 볼까?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임을 당했고, 바울은 작두에 목이 잘렸다.

안드레도 십자가에 달렸다. 세배대의 아들 야고보는 목이 잘렸다. 빌립은 십자가 형틀에 묶인 채 돌에 맞아 죽는다. 바돌로 매는 산채로 가죽을 벗겨 죽였다. 도마는 창에 찔려 죽고, 다른 시몬은 톱으로 몸을 반토막 만들어 죽이는 죽임을 당했다. 유다는 맞아죽고 또 다른 유다는 자살했다. 야고보는 돌에 맞아죽고, 맛디아는 도끼로 목이 잘렸다.

예수여, 나의 구세주여! 숨이 막힙니다. 아니야 아직 밀었다. 기억나는대로 적어보자. 프라하의 아달 베드로는 끝이 일곱 갈래인 창에 찔려죽고, 아드리아는 망치에 맞아죽고, 아우구스부르크의 아프라는 말들에 묶여 화형을 당하고, 프레네스테의 아가비도는 말들에 거꾸로 매달린 채 불에 타죽고, 로마의 야네스도 얻어 맞아 내장이 쏟아져 죽고, 불로냐의 아그리클라는 십자가에 달려 죽고, 시칠리아의 아구에다는 여섯번 칼에 찔려 죽고, 캔터베리의 알패지오는 황소 뒷발질에 죽고, 아나스타시아는 젖가슴을 칼로 도려내서 죽였고, 안토니오는 산채로 불태우고, 아폴리나리스는 몽둥이에 맞아죽고, 알렉산드리아의 아폴로니아는 이빨 모두를 뽑고, 불에 태웠으나 죽지 않으니 죽창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죽음을 당했고, 로마의 아우구스타는 목이 잘린 뒤 말뚝에서 화형을 당했고, 아우레아는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물에 던짐을 당했고, 시리아의 아우레아는 못으로 덮인 의자에 앉아 피를 흘리다 죽었고, 안디옥의 바빌라스는 목이 잘려 죽고, 니코메디아의 바드바라도 목이 잘려 죽었고, 키프로스의 바르나바는 돌에 맞아 초죽음이 된 채 화형을 당했고, 로마의 베아트리체는 목이 잘려 죽고, 베나요는 창에 찔려 죽고, 세바스테의 불라시오는 쇠못들에 찔려 죽고, 이몰라의 가시아노는 단검에 찔려죽고, 카스톨로는 산채로 매장되고, 로마의 체칠리아는 머리가 잘리고, 볼세나의 크리스티나는 연자맷돌에 시달리다가 뱀에게 물려죽고, 바르셀로나의 쿠크파스는 내장을 도려내고 죽였고,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는 참수를 당하고, 타루수스의 치라코는 재판관이 재판소 계단 모서리에 머리통을 짓찧어 죽였다.

아, 그만. 그만하고 싶다. 내 수첩 여기저기서 몇명 골라 여기에 옮겨보았다. 복음의 초창기의 일이다. 필자가 아시아 기독교 역사의 출발점에서 순교자들의 이름을 몇명 거론해 보는 뜻이 무엇일까? 내 수첩내용의 10%도 되지 않지만 무작위로 그들의 아름다운 이름들을 함께 불러보자는 뜻으로 열거한 것이다.

복음은 순교다. 순교가 반드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해야만 복음의 빛나는 문이 열린다. 내가 세상을 악하다 하였으니 세상이 주는 핍박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값으로 계산되어서는 안된다. 아시아의 복음현장은 1세기나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다. 7세기에 등장한 이슬람이 장애가 되어 있으나 그들을 복음의 길잡이로 삼을 수 있는 날이 오면 아시아의 승리가 올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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