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의 오산학교 교사시절 〈성서조선〉 동인들(동경고사 재학 중).

평고 자퇴 후 '순례'의 2년

함석헌은 하늘의 사랑을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입은 사람이었다. 함석헌의 90평생 인생에서 어느 때만이 아니었다. 세상에 오면서부터 가는 날까지 그는 하늘의 사랑을 입고 살았다. 그 사랑의 확증이 바로 그가 자신의 삶을 넘어 역사의 고비고비에서마다 옳차게 당해낸 고난(苦難)이라는 것이다.

한국사(韓國史)를 뒤흔들어 놓은 그의 `고난의 역사'는 사실 함석헌이 살아온 고난의 삶의 산물이었다. 함석헌의 유일 신앙인 우주를 품은 참과 뜻으로 인해 오는, 그래서 당하게 되는 고난. 함석헌은 거의 무지하리만큼 그 고난을 당해냈고 당해낼 뿐만 아니라 그 고난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꽉 믿었다.

역사적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 그것이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입은 사람이었는가를 말해준다. 함석헌은 현실적으로는 `망했다' 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서까지 그의 현존(現存)을 감사했다.

함석헌이 그 `참'이라는 것, `뜻'이라는 것 때문에 아픔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너댓살 되던 때부터로 알려지고 있는데(죽을때까지 이 걸음으로 p.141·1964 삼중당, 전집4·p.179 참조) 정말 그 아픔을 몸 전체로 앓게 되는 것은 그의 나이 열아홉 되던 해 3·1 만세 운동을 거치면서였다.

그때 그의 사촌형 함석은이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이 함석은이 중심이 되어 평양권의 학생들이 동원되었고, 자연히 함석헌이 그 앞장에 서게 되었다.

만세 운동이 잠잠해지면서 만세 운동으로 학교에서 제적되었던 학생들이 다들 각서를 쓰고 복교를 한다. 그런데 함석헌은 그럴 수가 없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3·1운동은 독립 운동이 아니었다. 물론 현실적으로야 독립 운동이었지만 함석헌에겐 이미 국가보다, 민족보다 더 높고 깊고 크고 위대한 `무엇'이 자리잡고 있었다.참, 뜻, 삶하는 것 말이다. 그 참, 그 뜻이 하나님으로 함석헌안에 있었고, 함석헌은 그 명으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함석헌이 입은 하늘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평고(平高) 자퇴 후 2년, 그 순례의 의미. 열아홉살 함석헌은 위가 아닌 저 안으로부터의 명을 받는다. 평양고보의 학생이기를 그만두라는 명이었다. 그는 깨끗이 학교를 자퇴했다. 그리고 두 해 동안 `명(命)에 의한 삶'을 훈련한다. 그야말로 지혈을 태우는 아픔이 이어졌다. 멍한 날들이 적지 않았고,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울고, 어린 신부와 잠자리에서 울고….

말하기 좋아하는 마을 아낙네들은 “화원국의원 큰 아들이 요즘 이상해졌데. 학교에 못다니게 되면서 미쳤다나봐” 하는 것이었다.

그같은 아픔, 고난의 훈련 없이 `참'과 `뜻'이 존립 이유가 되는 새 나라를 여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지라 하늘은 그에게 고난의 짐을 지운 것이다. 그것이 곧 함석헌에 대한 하늘의 사랑이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을 참의 사람, 뜻의 사람으로 새깃을 갖게 한 것이 바로 이 평양고보 자퇴 후 2년이었다.

함석헌 안에 `사람의 틀'이 잡히기 시작한 것이다. 실로 그것은 하늘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이제 오산학생이 되어야 하는 함석헌이다. 하늘은 그를 오산에 맞기기 전 새 틀을 짜야했다.

오산이 함석헌의 도장(道場)이었던 것이 분명하지만, 역사의 영원한 참뜻을 드러내는 아들(人子)로 계획하는 하늘은 유다른 선 훈련(先訓練)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선 훈련이 열아홉, 스물의 그 무서운 혼의 훈련이었다. `오산이 아무리 위대해도, 거기 이승훈·조만식·유영모·이광수가 있다해도 그 인격들만으로는 함석헌의 맘속에 담긴 `참'과 `뜻'의 아구를 틔울 수는 없었다.

아무리 크다 해도 그들은 새 역사·새 나라· 새 세계, 더군다나 새 종교에 대해서는 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정직하고, 의롭고, 부지런하고, 나라와 백성을 내 몸처럼 아끼는 애국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에서라면 오산의 지도자들을 과소평가 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까지에서 끝나는 이들이었다.

국가와 민족, 독립, 신앙(물론 개인적인)이 그들의 처음이요, 나중이었다. 하늘이 함석헌에게 요구하는 `사람 틀'은 우주적인 것이었는데 말이다. 해서 하늘은 함석헌을 오산으로 이끌기 이전 새 종교, 새 역사, 새 인류의 틀자리를 짜야 했다는 것이다.

최소한 `국가·국가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가쯤은 간파하도록 말이다. 함석헌은 자신을 향한 이같은 하늘의 뜻을 밥처럼 익혔다. 아니나 다를까? 평고를 자퇴하고 난 함석헌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 그의 생(生)의 대전환을 이렇게 간증한다.

“관(官)과는 원수가 됐다. 막연은 하지만 나는 무슨 새것을 발견하고 잃었던 무슨 커다란 것을 찾은 듯 했다”고. 함석헌이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 관. 그 관이란 일본의 행정권(行政權)이 아닌 국가주의를 말하는 것이었다(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p.78 삼중당, 전집4권 p.268 참조).

오산(五山), '나' '너' 아닌 '우리'


오산은 함석헌에게 `맞춤학교'였다. 학교의 형편, 현상은 글자 그대로 난장(亂場)이라 해야 옳았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성(聖)스럽다 하리만큼 지극함이 흐르는 분위기였다. 우선 함석헌이 오산에 와 놀란 것은 예전 평고에서와는 전혀 다른 학생들 간의 교우관계와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태도였다.

평고는 공부가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따라서 경쟁하는 학교일 수밖에 없었고 공부는 늘어가는 데 공공한 정신은 나날이 허약해 가고 있었다. 그런데 오산은 전혀, 전혀 다른 둥지였다. 경쟁이라니? 너, 나 마저도 없었다. 1등, 2등 따위같은 것은 더군다나 몰랐다. 대신 오산을 이끌고 있는 것은 `우리'였다. 그런데 그 우리라는 것이 희안했다.

민족주의 소굴이라며 일본헌병이 불태워버린 교사를 선생과 학생들이 일체가 되어 다시 일으켜 세운 임시건물에 4∼5백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동맹휴학 하다가 타교에서 퇴학당하고 온 학생, 문학청년인체 하는 30세 학생에 교회 장로도 있고, 서당 훈장 하다 온 학생도 있고 정말 가지각색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그 모두가 `우리'라는 것이다. 또 다른 것이 학생들에 대한 선생들의 자세였다. 회초리를 들고 돌아다니던, 야! 너, 심하면 이놈 저놈, 이 자식, 저 자식 하던 이전 평고의 선생들과는 달라도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게 아주 깍듯이 경어(敬語)를 쓰는 것이 그랬다.

“예. 그랬나요?” “네. 그랬군요.”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럼요. 물론이지요.” 함석헌이 오산학생이 되어 날이 흐를수록 절감하게 되는 것이 이 `우리'라는 생각이었다.

물론 학생들 중에는 집안이 부자도 있고 가난뱅이도 있었다. 공부실력은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었고, 부자지간 같은 나이 차이의 학생들이 수두룩 했다. 그런데도 신비스러우리 만큼 그저 우리, 우리였다. 이 오산학교의 `우리'는 함석헌의 타고난 평화정신과 맞물려 세계 국가주의의 초석을 이룬다. 더구나 이때 `학생경제에도 맞지 않게 사서' 읽고 또 읽었던 H.G 웰즈의 〈세계문화사대계〉가 함석헌으로 하여금 세계 국가주의 사상과 함께 과학주의 사상에 심취하게 했다.

이 오산은 함석헌이 청소년 시절에 거친 학교만이 아니었다. 생(生)을 다시 짓는 용광로였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지극한 뒷바라지에, 바람이 큰 아들 석헌을 의사 만들고자 했고, 석헌 역시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으로 이제까지 왔지만 오산에 안기면서부터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가기 시작했다.

우선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린 것이다. 함석헌이 의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버릴 때부터 함석헌은 가정과 가족으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물론 이같은 `틀'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오산의 힘' 때문이었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그 오산으로부터도 벗어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산에서 아구(牙口) 트기 시작했다는 세계국가주의와 과학주의 사상이 그같은 사실을 증거해 준다.

“과학과 종교가 충돌할 때는 과학편에 서는 것이 옳다. 그리고 거기서 과학보다 더 높은 종교적 자리를 찾아 올라가야 한다”는 등의 그의 60대 이후의 변증은 이미 그의 20대 초 오산시절에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함석헌은 그의 전집 4권 214쪽 “…이 오산시절부터 나는 옛날같이 남을 따라서 미리 마련된 종교를 믿기보다는 좀더 깊고 참된 (내)믿음이 있어야 겠다는 생각이 시작됐습니다.” 함석헌에게는 미국의 어떤 선교사들, 국내의 어떤 유명하다는 목사·학자들이 예외없이 다 `남'이었다. 함석헌에게 중요한 것은 나, 나, 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이거나 부처님이거나 다 내가 만난 이여야 했다. 이 거룩한 싸움이 시작된 곳이 바로 오산이었다.

함석헌과 유영모(柳永模)를 이은 오산(五山)


개인적인, 사회적인 역사의 중심판(中心版)에 있으면서도 그 역사의 판을 넘어 존재하는 영원을 관심해야 하는 함석헌에게 이때 절대로 요구되는 것이 그 `역사 저편'을 상상이나 추상만이 아닌 체험으로 이끌어줄 선사(先師)였다.

'선사'란 내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걸은 사람을 말한다. 물론 그 선사의 선행(先行)을 따르는 사람은 그 선행을 `절대의 길'로 따라서는 안될 것이었다. 어떤 사람의 길도 절대일 수는 없는지라, 뒷사람에 의해서 더욱 절대에 가깝도록 이어져야 한다. 이때 함석헌에게 하늘로부터 주어진 축복이 있었다.

유영모가 1922년 초 오산학교 교장으로 온 것이다. 함석헌이 유영모를 만났다. 그것은 실로 대사건이었다. 이제까지 함석헌의 저… 밑 가슴에 아구트기를 기다려오던 `역사 저편'의 주제들이 대기운(大氣運)을 시작한 것이다. 교장 유영모의 강의시간은 함석헌에겐 감격, 감격의 시간들이었다.

죄의 탯줄을 끊는 시간들이었다. 이전에 교회, 학교에서 듣던 소리들과는 전혀 다른 소리들이
었다. 함석헌은 속으로 맘으로 유영모를 “선생님!” 했다. 함석헌은 정말 행복했다. 평생을 투자하고 싶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어야 말로 구원 아닌가? 함석헌은 유영모를 배우는 일에 심혈을 다했다.

함석헌이 세상에 꼭 한 분, 평생토록 `선생님'이라 불렀던 유영모. 그는 오산에서 딱 1년 교장으로 있다가 교육청으로부터 정식(?) 교장 허락이 나오지 않아 오산학교를 떠나게 되는데, 떠날 때, 선생님을 그 읍역까지 모시게된 제자 석헌에게 유영모는 “내가 함군 한 사람 만나러 오산에 왔었나봐” 했다.

후에 유영모는 동양사상의 대가로, 함석헌은 고난사가(苦難史家)로, 씨알사상의 창도자로 불려지게 된다. 함석헌이 마치 칼날 같은 역사의 현장지킴이로 평생을 살면서도 소위 그 역사의 주류(main stream)라는 것들을 거부할 수 있었던 것. 아니 그 역사 저편의 주제들을 역사 속에 살려내기에 일생을 던질 수 있었던 데는 유영모로부터의 기운이 함께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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