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서 발견하는 대속의 실체

세계 기독교 역사를 본다. 현재 기독교(신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교과서는 그 누구의 작품이든 로마 가톨릭의 틀, 곧 그것의 형식과 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필립 샤프(교회사학자) 같은 이들이 이 말을 들으면 발끈하여 고얀놈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인류 공통의 행복(축복)을 추구해 낼 용기가 있다면 신자이면 누구나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에 따라서 오신 성령께서 활동을 시작하신 교회시대의 출발점부터 기독교가 세계 각 처로 성장해 나가는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르되 크게는 유럽과 아시아로 나뉘어진다. 로마의 기독교가 게르만 민족사와 함께 서유럽에 틀을 잡으려 할 때, 로마지역 보다 더 크지만 동교회(the church of the East)로 또는 오리엔트(Orient)의 이름으로 페르시아 영향권 지대에서 큰 무리를 형성하였으니 이들이 장차 다양하고도 거대한 아시아 교회의 틀을 이루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까지는 아시아 교회들은 서유럽 문명으로부터 계속 냉대를 받고 있었다.

이제는 어느 쪽도 세계를 독점할 수 없는 한계를 느낀 유럽과 아시아 기독교는 곧 유라시아 기독교의 이름으로 제 3의 눈, 제 6감의 눈 또는 하나님의 눈이라 해도 두려울 것이 없는 몸짓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시대 모두를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역사를 다시 쓴다는 두려운 마음으로 동·서 또는 유라시아의 동행(동반)시대인 오늘 이후의 인류를 향한 균형잡힌 역사의 날을 준비해야 한다.



1. 메시아 예수의 등장


'말'이라는 것이 본격적인 '글'의 역사로 뛰어드는 히브리의 BC 10세기 이후에 하나님은 초월적이기도 하고 화려 찬란한 어법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선견과 선지의 인물 이사야를 통하여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라 쳐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도무지 그 뜻을 쉽게 해독하기가 어렵다.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다'로 해석할까?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사람되셨다로 할까, 그렇다면 사람이 하나님처럼 사는 날을 예고하심이 아닐까?

이렇게 해석 할 수 있다면 이는 보통 사건이 아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다윗시대 무렵에 히브리어를 하나님께서 내셨는데 이스라엘은 그후 3백여 년 동안 이 언어를 갈고 다듬어 하나님의 뜻을 담는 그릇으로 만들었다. 말과 글이란 신묘한 의미의 세계이다. 말은 선사시대부터 있어왔으니 글을 기록으로 남길 무렵부터는 역사시대라고 호칭하는데, 글로 하나님의 심중(의중)을 표현하기 시작할 때부터는 하나님이 자기 형체를 지니고 인간의 무대에 뛰어드는 표적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특히 히브리어는 그렇다. 이사야 7장 14절은 그 백성들이 주목하고 귀에 담았다가 가슴으로 싹 틔어야 할 소중한 자산이었는데 방심하다가 그만 왕조가 무너지자 계시마저 주춤거렸다.



1) 왕국의 좌절


이스라엘 왕국이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끝으로 통일 왕조가 끝나고(BC 960년 경) 북조와 남조로 나뉘어 티격태격하다가 북왕조가 앗수리아에 의해 망하고(BC 722년) 남왕조 또한 신 바벨로니아에 의해서 망했다(BC 586년).

남북 왕조가 다 무너지고 망한 뒤에 남조 예루살렘의 자식들이 바벨론 그발 강가에서 뉘우치고 반성하던 시기에 이사야 7장 14절 해석자의 등장을 보게 되었다. 그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7장을 기록한 사람 자신이거든 이사야가 그의 이름일 것이고 아닐 경우, 그가 말하기를 내게는 '이사야'보다 더 좋은 이름이 필요 없으니 그냥 '이사야'로 호칭하라고 한 인물일 수 있다.

후자일 경우, 그는 분명히 경지를 이룬 사람이 틀림없다. 그가 큰 인물이라 함은 뜻을 깨달았으면 되었지 굳이 이름이 필요할까 라고 했을 것만 같아서 하는 말이다. 그럼 그가 이사야 7장의 임마누엘을 해석 할 수 있었을까?


2) 고난의 메시아 예고


이사야 53장은 이사야 7장 14절의 해석이다. 이사야 53장 1절 이하를 읽다보면 이 사람은 천재임을 알 수 있다. 이 세상의 천재가 아니라 하늘 땅 모두의 영역에서 천재다. 감히 하나님 만큼이라고까지 무엄한 표현을 해 볼 수 있다.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리고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표현으로 인류 역사를 새롭게 출발코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도도하게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이 사람은 포로기 바벨로니아의 조로아스터교 틈바구니에서 살았으면서도 그들 이교도에 현혹되지 않고, 오히려 족장시대의 '원시 대속론'인 '이삭의 모리아'를 상승 발전시키고 예술적 표현기법까지 동원하여 성공적인 예언자의 몫을 감당했다.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용도폐기하신 성전제사를 복구하였으나 이는 하나님께 정면 도발을 한 셈이 되었고, 또 한쪽 무리는 성전주의는 극복했다하나 하나님의 메시아를 회피할 명목으로 유대교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사야 53장은 골고다의 대속물, 대신 죽고 또 함께 죽어 대속(代贖) 하는 완전한 구원의 길을 제시했다. 이 사람 이사야의 재능은 혹시 그가 메시아의 이름으로 나타난 선지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경외감까지 느끼게 한다.



3) 메시아 등장


드디어 이사야 7장과 53장의 지지를 받고 나타난 메시아 예수는 그가 활동하는 시대와 충돌하게 된다. 가족과의 충돌(막 3:32∼35, 요 7:1∼), 따르는 제자들의 한계를 안타까워하시면서 결별 선언(요 6:26∼51),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는 것은 교육으로가 아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다시)태어남에서만 가능함을 선언(요 3:1∼3)이며, 더 나아가서 자기 자신을 낮추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요 5:30).

그런데 그의 생애는 마치 미완성처럼 보인다. 예수는 자기 몫의 일감을 남겨둔 채 떠나신다. 바로 이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나이가 30여세 뿐인데 자기 인생을 스스로 마무리하는 것은 물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인내의 시간마저 남겨 둔 채 떠나간다.

예수는 요한복음 16장 12절에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고 선언하고 있다. 놀랍다. 3년동안 그토록 정성스럽게 가르쳐 온 제자들 교육을 포기하는 듯한 발언이다. 어디서 충격을 받으셨기 때문일까? 떠 오르는 대목이 있다.

요한복음 14장에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였을 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했다. 그러나 도마는 '네 알았습니다' 라는 화답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메시아 예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도마의 뒤를 이어 빌립이 나선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 하는 말을 거침없이 뱉어낸다. 어이 없으신 예수는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늘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하신다. 여기에 예수의 절망이 있다. 놓치지 말고 다시 읽어보자.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라고 하지 않는가. 문제는 깨달음이다. '내가 이렇게 오래…'라 하시는 분위기는 몸서리 치는 듯한 안타까움을 느끼게 한다.

역시 존귀에 처하나 깨달음이 없으면 멸망하는 짐승과 같은 것이 인생인가.

요한복음 16장 12절의 한계는 14장에서 오는 절망의 표현 일 수 있다. 제자들과 오랜 시간을 함께 하셨으나 저들은 도무지깨닫지 못하니, 여기서 예수는 결단을 필요로 했을까? 그러나 16장 12절 직후인 13절을 보면,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하여 넉넉한 배려도 하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하나님이신이가 사람에게 절망을 하실 수는 없으시겠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맡으신 수고의 분량을 침해하지 않으려 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자 예수의 경우에도 성령 하나님의 영역을 존중할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또 한번 정리하면 하나님은 독생자로 오시고, 오신 성자 예수는 성령을 부르고, 성령께서는 성도를 부르기 위하여 십자가를 경험한 내게로 달려오시는 것이다.



4) 성령의 강림 예고


예수께서는 성령 하나님이 하실 일은 남겨두고 자신의 그 몸을 골고다에 단 번에 드리고 있다. 예수는 요한복음 16장에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하였으나 여기서 그의 말씀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와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의 관계는 서로에게 원망의 뜻은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너희가 내말을 깨닫고자 하여도 또 내가 너희를 가르치고자 하는 열망이 무한해도 우리들 사이에 위치하실 '성령의 때까지' 우리는 서로 서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고 예수의 요구이다.

이 부분을 다시 정리하면 예수 자신에게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아 있고, 제자들 또한 성령과의 만남의 시간을 위해서 기다림의 시간이 각기 남아있다. 여기서 예수께서 행하실 마지막 일은 십자가의 죽음이다. 바로 이 부분이 이샤야 53장 요구의 화답하고, 곧이어 그의 신분은 이사야 7장의 임마누엘이심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낯익은 도움 말 하나를 보태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로 이어지는 완료형 문장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의 고백으로 성령과 성도가 만나고 성령과 성도는 물론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신다. 이를 증거하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요 17:21)로 이어가는 내용이 된다.

역사위에 탄생 할 교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이른 바 오순절 성령 강림의 시간이다. 이는 예수의 명령이시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 1:4)

바로 이 말씀의 순간을 부여 잡고 기다리는 시간이 교회 탄생을 부르는 성령 하나님의 시간이다. 어느 누구도, 또는 오늘의 기독교 역사 2천년의 자원과 자산 모두를 걸고 여기 이 말씀(행 1:4)의 시간을 비켜서지 않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것이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출발점에서 아시아와 유럽으로 복음이 확산되는 과정을 자연스러운 흐름을 따라서 살펴보겠습니다. 프랑크인들, 곧 게르만인들이 유럽기독교의 주인이 되어 기독교 역사를 독점해 온 것이 사실이고, 종교개혁기 이후에도 이렇다 할 역사가가 부족하여 세계 교회사의 형식은 기독교(신교)가 로마 가톨릭의 사관(史觀)의 틀을 벗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듯이 해석해 보겠습니다.

아마, 전개 과정에서 다른 의견들도 있을 것이고, 아니라고 하고 싶은 이들도 있겠으나 소신껏 내 견해를 객관화시켜 보겠습니다. 유럽사, 동유럽사, 아시아사 등까지를 한 틀 안에서 다루면서 세계 각 국 역사의 기초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제목을 `역사 강의'라 하는 것은 자유로운 몸놀림을 위해서 선택했습니다(역사강의는 격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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