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1936년도 오산학교 1학년 갑조반 담임이었던 함석헌 선생과 학생들.

내촌에게서 세례를 받고


함석헌은 동경고사를 졸업하고 3일째 되던 3월 17일(1928), 내촌(內村)을 찾아가 세례를 받았다. 그는 당시의 교회법 때문에 영원히 '교회의 사람'이 될수가 없었다.

당시 교회법에 12살이 돼야 받을 수 있었던 학습을 함석헌은 의젓한 아이로 소문이 나 9살에 받을 수 있었는데 세례는 그러지를 못했다. 세례는 온 가족이 다 믿어야만 받을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이었다. 함석헌의 부모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그가 동경사범에 재학중일 때였다. 그는 후에 제도권 교회에서 제도적 세례를 받을 수 없었던 그 청소년 시절을 회상하면서 “교회신자는 못되도록 하나님이 마련했던가 보다”라고 술회한다.

정말 그랬을까? 정말 하나님이 그로 하여금 '교회신자'는 되지 못하게 한 것일까? 그래서 교회 밖의 사람 내촌을 찾아가게 된 것일까? 어쨌던 함석헌은 내촌을 찾아갔고, 내촌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내촌이 베푸는 세례를 받았다.

일본의 저 유명한 암파서점(岩波書店)에서 펴낸 내촌감삼전집, 월보 39호, 고기종사(高崎宗司 역, 1983·12)에 실린 내촌의 1928년 3월 17일자 일기는 함석헌에게 베푼 내촌의 세례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토요일이었는데 일기는 '맑음'이라 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한 사람, 동 여자사범 세 사람, 도쿄여자대학 한 사람, 합해서 다섯 사람. 모두가 금년도 졸업생들인데 이들에게 오늘 세례를 베풀었다. 늘 하는대로 간단하고 엄숙한 식이었다. 우리들에게 세례는 입신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그러므로 지원자의 절실한 요망에 따라서만 베푼다. 이것은 예수와 함께 사랑의 생애를 보내며, 그와 더불어 고난과 영광을 함께 하겠다는 기원과 결심의 표창(表彰)이다. 교권적으로는 아무 뜻도 없다. 그만큼 신성하고 의미심장하다.”

이 일기 첫머리의 '고등사범학교 한 사람'이 바로 함석헌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함석헌은 네 사람의 여자대학 졸업생들과 함께 세례를 받은 것이다. 내촌은 목사가 아니면서도 세례를 베풀었고, 함석헌은 목사가 아닌 내촌에게서 세례를 받았으니 조선기독교(朝鮮基督敎) 입장에서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이었다. '교회만이 하나님의 현존'인 터에 거룩한 세례가 교회 밖에서 행해진다니….

그러나 함석헌이 동경고사를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에 역사교사로 부임했으나 당시에도 그 후에도 내촌에게서의 세례 일로 문제가 된적은 없었다. 내촌에게서 세례받았다는 사실을 함석헌이 말할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그 사실은 흑막(?) 속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촌의 세례사(辭) 내용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내촌 앞에 무릎을 꿇은 함석헌으로서는 그 자신의 고백이 있었다.

'이미 오산에 정해진 몸, 일생을 오산에 드리리이다'라는 서원이었다. 이 세례를 받으면서 함석헌의 얼굴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었고, 스스로 이기기 어려우리만큼 전신이 사시나무 떨듯 했다.

함석헌은 그 후에도 이같은 전신진동의 경험을 수차례나 하게 되는데, 그는 역사 앞에서 한 차원의 승화를 거듭하려 할때마다 그같은 체험을 하곤 했다. 어떤 때는 이같은 경험이 너무 강하게 와 '오, 님이시여. 감당하기 어렵사오니 거두어주소서'라고 부르짖기도 했다. 어쨌든 함석헌은 이 세례를 통해 '오산의 생명'으로 다시 났고, 진액을 다 쏟아 대학진학예비학교 1년을 합해 꼭 다섯해 학문과의 싸움으로 날을 닫고 열던 동경을 뒤로하고 그의 약속의 땅 오산에 돌아왔다.


함석헌의 제단(祭壇) 오산


스물여덟 청년 함석헌이 오산(五山)이라 이름하는 제단에 번제물(燔祭物)로 준비되었다. 1928년 4월초 어느날이었다. 함석헌의 오산고보에서의 교편생활이 꼭 10년이었는데, 함석헌에게 있어 그 10년은 교단에서의 가르치는 일보다도 학생들 속에서 '사는 일'을 오히려 업(業)으로 삼은 세월이었다.

출근 첫날 설립자인 이승훈의 뜨거운 환영 아래 전 교사들에게 인사를 드렸고, 다음날 전교생이 모인 운동장에서 부임인사를 하게 되었다. 함석헌은 부임사에 앞서 성경말씀 한곳을 찾아 읽었다. 요한복음 10:11∼15절까지의 말씀이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내촌에게서의 세례도 그랬지만 그의 부임사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 아니, 요한복음 10:11∼15절 말씀을 부임사의 앞머리에 놓은 것은 내촌의 세례에서의 서원을 재확인 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이 찾은 요한복음 10:11∼15절은 '선한목자'라는 주제를 가진 귀절이다. 그러니까 함석헌은 자신에게 맡겨지는 학생들을 자신의 양무리들로, 그리고 자신은 요한복음 본문의 선한 목자로 자임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는 '오산의 사람'으로 죽을 것을 선언한 것이고, 그 서원의 핵심은 오직 '참의 길'이었다. 그저 참을 찾으며 참을 산다는 것.

요한복음 10장의 주역인 그 목자가 이스라엘의 애국자가 아니었듯이 함석헌 역시 조선의 애국자가 아니었다. 그렇다고해서 참을 전한다든가, 증거한다든가도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참을 사는 것, 참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함석헌의 오산 10년은 바로 이 참의 실현을 위한 세월이었다.


막일꾼 함석헌


이렇게 부임한 함석헌은 실로 눈부신 교사활동을 개시한다. 오산학교 교사로서 그의 활동은 마치 '막일꾼'과 흡사했다. 10년 재직기간 동안 하루도 결근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로도 그의 성실성을 증언해 주는 것이지만, 해가 거듭하면서 그는 간데없는 '막일꾼'이 되어갔다.

수학선생이 부득이한 일이 있어 결근하는 경우 수학시간을, 물리학 선생이 결석하는 날은 물리학 시간을, 심지어는 과학이며 미술까지를 도맡아 교수하는가 하면 학생들의 풍기를 다잡는 일, 특히 문제아들을 선도하는 훈육부분까지 그 활동은 멈출줄 몰랐다. 뿐만 아니라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로 자신보다 연상이요, 선배들이 즐비한 터에 2년반여 동안 거의 오산학교의 교장역을 수행하기도 했다.

오산고보의 실제 운영자였던 이승훈이 1930년 5월 9일 세상을 떠나면서 오산학교는 두 가지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우선은 일제의 격심한 탄압에 갈수록 심해지는 재정문제가 그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사상이 급격히 유입되면서 급진적 혁명세력이 조직적 성향을 띠게 되고, 급기야는 학생들의 동맹휴학이 빈번히 발생하게 된 것이다.

오산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동맹휴학을 주동하는 학생들이 영웅시되는 풍조가 만연해가면서 학생들이 선생을 구타하는 일까지 빚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교장선생이 정기수였는데, 그는 이같은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아예 교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2년반 동안 오산고보는 교장 없는 학교로 운영되었는데 이때에 오산을 꾸려낸 것이 함석헌이었다.

결근하는 선생들의 수업을 보충하는 일, 특히 반동성향이 강한 학생들을 대면하는 일, 때로는 학교 운영자금을 염출(捻出)해 오는 일까지를 담당해 냈다.


홀로 지킨 폭력교무실


이같은 교장 아닌 교장의 역할을 실지로 수행해 가던 함석헌이 이런 와중에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학생들로부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채 구타를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학생들이 떼지어 난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접한 선생들이 하나같이 피신을 해버렸는데 함석헌은 교무실의 자기 책상에 앉은채 팔을 세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이제 바로 닥쳐올 일을 기다리기라도 하는듯 마치 기도하는 자세로 고요를 지키고 있었다.

교무실로 쳐들어온 학생들은 거칠것이 없었다. 책상을 뒤엎고 의자들을 내던지고, 급기야는 함석헌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감싸고 있는 그 얼굴을 가격(加擊)했다. 함석헌은 그 가격을 그대로 받았다. 놀란 것은 학생들이었다. 평소에 존경하는 선생님이었기 때문에 사실 함석헌은 학생들이 '손좀 보아주어야 한다'고 점찍은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예외였던 선생님만 구타를 당하는 엉뚱한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일이 벌어진 뒤 구타당한 이가 함석헌 선생님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학생들은 역시 하나같이 교무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학생들은 어쩔줄을 몰랐다. 일이 너무 다른 방향으로 흘러버렸기 때문에. 이튿날 그들은 누구의 제안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모이게 됐고, '선생님께 잘못을 빌기'로 했다. 스트라이크를 주동했던 학생들 몇 사람이 교무실로 함석헌을 찾았고, 함석헌 앞의 마룻바닥에 일렬로 무릎을 꿇었다.

“선생님, 용서해 주십시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잘못의 용서를 비는 학생들은 몹시도 진지했다. 함석헌은 무릎꿇은 학생들을 향해 아주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히려 너희들이 고맙다. 사람에게 실수야 없을 수 없지. 또 너희가 그토록 격분한 데는 나를 비롯한 몇몇 선생님들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함석헌이 단순히 학생들의 묶인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서 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 자랑스런 민족혼으로 다져진 오산이었지만 그 안에도 절반은 일본인이 되어버린 교사들이 있었다. 동경대학에서 철학을 하고 왔다는 일본어 교사 윤(尹) 모, 특히 교련담당인 이(李) 모 같은 경우가 그랬다.

이 모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예비역 소좌였다. 사립학교도 교련령이 내려져 학생들의 애국심이 다치지 않도록 고르고 또 골라서 교련선생으로 초빙해 왔는데 이게 크게 빗나간 인사가 되고 만 것이다.
어느날이었다. 아침 조회시간에 그가 단 위에 오르더니, “천왕폐하의 군인이 돼서 전쟁에 나가서 죽게 되면 '천왕폐하 만세' 하고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맨 뒤에 서있던 함석헌은 “치가 떨려 견딜 수가 없어 당장 끌어내리려 했더니 여럿이 말려서” 그 아침 조회를 수모속에 마쳐야 했다.

그런데 혈기뿐인 학생들의 경우 오죽했겠는가? 그래서 학생들의 그 난동행위에 대해 “나를 포함한 몇몇 선생님들에게도 책임있다고 생각한다”고 한 것이다. 교무실 안에는 여러명의 교사들이 함께 있었지만 분위기는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마치 함석헌만이 말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진듯 했다. 함석헌의 말이 이어진다.

“내가 너희들 행위에 견딜 수 없도록 슬픈 것은 너희들의 그 폭력행위 때문이야. 교무실의 집기를 부수는 것도 안될 짓이지만 사람을 폭행한다니…. 난 그것을 용서할 수가 없어. 내가 폭행을 당했다는 것 때문이 아니야. 모든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계셔. 하나님의 씨가 있단 말이야. 사람에 대한 폭행은 단순히 폭행으로만 끝나는게 아니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하나님의 씨를 죽이게 돼. 어떤 경우에도 폭력은 안돼. 알겠는가?”

함석헌은 그 제자들과 함께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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