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지상의 하늘나라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 사마르칸드 리케스탄 광장. 이 도시는
동서교회사에서 중요한 곳으로, 유럽교회가 이곳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다.

오순절에 오신 성령 하나님은 제3차 하늘나라의 터를 잡으셨다. '교회'의 이름으로. 성령께서 오시자, 제자들은 물을 만난 고기떼 분위기였다. 먼저 베드로가 돋보인다. 그는 성전 어귀에서 말씀을 선포하자 3천명, 다시 또 그가 말씀을 들자 2천명의 새로운 신자들이 생겨났다.

당시 예루살렘 인구가 절기를 제외하고는 대략 5만명이라는 통계가 있는데 그 인구는 남자만 계산해도 전체 인구의 10%가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며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만약 여자까지 포함하고, 어린아이도 합하면 전체 인구의 25%는 될 것이다(행 4:4). 이 숫자의 의미는 무엇일까?


1.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담을 에덴에서 추방하실 때 입혀주었던 가죽옷(창 3:21)의 구체적 현현(顯現)으로 메시아 예수가 하나님의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 지나서, 드디어(비로소)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갈 4:4) 인류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여신 행위였다.

그러나 기독교의 초기 역사를 살펴볼 때, 경우에 따라서는 난감한 벽을 느끼기도 한다. 역사의 기록이 말해 줄 터인데 그 기록이 넉넉지 않다. 제자들 시대는 앞서 말한대로 베드로의 설교가 있을 때(행 2:41) 곧바로, 이른바 '예루살렘 생활공동체'가 열린다. 베드로와 요한이 중심이 되는 듯 하다(행 4장).


2. 예루살렘 공동체교회


사도행전의 기록에 의존해 보면 예루살렘은 성령강림 후 곧바로 교회를 탄생시킨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이 무대를 필자는 제3의 하늘나라로서의 교회라 한다.

다시 말하면 메시아 예수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면, 교회는 지상에 나타난 하늘나라다. 이같은 자부심과 존엄이 교회에 있어야만 교회가 교회되는 존재 이유일 것이다.


1) 공동체를 칭송하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활동하니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무리로서의 교회는 큰 은혜 가운데 지냈으며 그들 중에 핍절하여 고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기독교인들 중 하는 말로 '기독교 공산주이'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아름다운 언어 표기로는 공생주의, 또는 한가족주의라고 함이 더 좋은 표현이 된다.

이 모습을 흠모하고 있을 때, 또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 공동체는 잠깐 반짝였을 뿐이라고 한다. 그때, 그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한마디가 있다. 예루살렘 공동체, 곧 하나님의 제3의 선물인 성령공동체를 깨버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바리새파 광신도들이고 그들 중 수괴는 율법사 사울(후에 바울)이라고 일러준다.


2) 1차 시련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자기 재산을 팔아서 절반은 감추고 나머지 절반을 바쳤다가 베드로에게 발각되었다.
아나니아 부부가 왜, 이같은 짓을 했을까? 그리고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조금은 격려할 수는 없었을까? 아무것도 내놓지 않으면서도 입술 장난으로 사는 기독교인들도 많은데 재산의 절반을 내놓으면서 전부라고 했다. 해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즉살(卽殺)시키는 베드로의 행위를 하나님의 동작으로 볼 수 있을까? 이건 분명 이중 불상사가 될 것만 같다.


3) 2차 시련

예루살렘 공동체의 대표인 스데반의 희생이다. 그것도 후일에 기독교의 대표적 신학자요 선교사인 바울의 손에 의해서였으니 더더욱 안타깝다. 단순히 사람 하나가 희생된 것이 아니라, 문제는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가 파괴되었다는 점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특히, 예루살렘 공동체 책임자 7명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스데반을 꼽는 이유는 그의 설교를 통해서이다. '스데반 설교'(행 7:2∼53)와 '베드로 설교'(행 2:14, 41), 그리고 '바울 설교'(행 22:2∼21)를 비교해 보면 스데반 설교에서 또다른 이야기를 발견하게 된다.

또 다른 이야기라 하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셔서 주신 말씀 중 말씀을 스데반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말씀은 기독교의 존재 그 자체를 문제삼는 내용으로 기독교의 금기 아닌 금기가 되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2장 19절에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셨는데 기독교는 이 말씀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첫 번째 교회로부터 받은 선물이 '스데반의 죽음'이다. 물론 당시 스데반을 죽인 자들은 유대들, 특히 사울이 소속한 바리새파 집단의 중심 세력으로 보아야 한다. 사울(바울)은 스데반 죽이는 데 증인석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도행전 기록자인 누가는 사도행전 7장 60절 끝부분에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로 기록해 둔 것을 보면 이 사건의 중대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도행전 기록자는 바울의 제자이며 주치의도 되는 인물이다. 스데반이 바울(당시 이름 사울)에 의해 희생당한 뒤 30여 년 가까운 후의 기록인데도, 그는 바울의 그때 그 판단 또는 그 행위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바로 이것이 성경 기록자의 자세라고 밝히는 듯이.

사울은 스데반 희생을 마땅한 일로 동의한 이후 곧바로 다마스커스에서 예수에게 붙잡힌다. 예수께서 사울을 잡은 것이 아니라 스데반의 도도하고 장엄한 인생의 마무리를 지켜 본 사울의 충격이 그토록 손쉽게 예수에게 항복하게 된 이유가 되었다는 의견이 많이 있다.

스데반의 최후는 사도행전 7장 54절부터 60절까지를 읽으면서 저마다 판단해 보기로 하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서 스데반이 죽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기독교는 잃어버렸다. 그것은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의 상실이었다.


4) 3차 시련, 이는 기독교 자신의 시련이다.

스데반이 예루살렘 공동체 교회의 대표임은 그의 영적 실력에 의해서였다. 그의 실력은 설교 내용에 나타났다.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행 6:14). 이 내용은 요한복음 2장 19절 바로 그 부분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때 그때 유대인들의 시비가 성전을 헐고 삼일 안에 짓겠다고 한 내용이었다. 스데반의 확신도 '이곳(성전)을 헐고'의 내용에서 요한복음 2장 19절과 일치하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사도행전 6장 14절이 밝혀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대목을 좀더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은 스데반이 개인적으로는 영생과 부활에 참여했을 것은 신뢰할 수 있으나 스데반이 죽을 때 함께 죽어버린 예루살렘 공동체의 운명은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복원되지 않았음이다.

바로 이 부분이 우리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스데반의 죽음에 대하여, 사울은 바울로 변신하여 새사람이 되고 기독교의 일인자 자리를 넘볼 만큼 되었으나 그가 스데반이 죽게 되었을 때 자기의 행위에 대한 반성이나 후회 같은 표현을 했다는 증거를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예루살렘 공동체가 바울공동체로 바뀌어 돌이키기 어려운 방향으로 역사는 역사의 주인이신 이의 뜻을 외면해버렸다.

여기까지가 아마, 재림시대 이후로 구원사의 완성을 순연시키게 되는 것 같다. 물론 기독교가 카타콤 시대를 지나 로마제국에서 정착을 한 후에 교회와 수도원 제도로 양립하면서 절반의 회복은 가능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16세기 종교개혁기 이후에 탄생한 기독교 신교는 수도원 제도를 멀리하고 있으니 기독교는 순기능이 모자라서 도의적으로나 영적 부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5) 사마리아 선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로 이어지던 예루살렘 교회가 갑작스러운 타격으로 스데반을 잃고, 곧바로 예루살렘은 큰 핍박기로 들어갔다.

핍박이 극심하여 열두 사도들 외에는 예루살렘에서 버티지 못하고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행 8:1∼).

사울(후에 바울)은 교회를 철저하게 핍박하고 신자들을 붙잡아 감옥에 보내는 일을 인정사정 없이 해냈다.
그러는 사이에 사마리아 지경에 사도들이 찾아갔다. 베드로, 빌립, 도마 등 호기심이 있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사마리아행이 불붙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이렇다 할 지도자를 세우거나 중심될만한 교회를 일으키지 못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신 일은 요한복음 4장에 충분히 드러나 있다는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사도시대가 사마리아 차별을 극복하지 못한 것 아니었을까?

이는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를 '사마리아인' 취급을 했던 데서도 예수께서 사마리아에 대한 관심의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성공적인 선교지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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