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6)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예루살렘 교회'가 구체화되기 이전에 스데반의 순교가 발생하였다. 스데반이 차지하는 비중을 어느 정도로 계산해야 할까? 스데반을 주목하는 최초의 기록은 사도행전이다. 사도행전 기록 연대는 AD 70년 전후의 인물인 누가에 의해서였다. 누가는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기부터 그 모습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바울의 동역자요 제자 겸 친구 또는 그의 신분이 의사였기에 주치의 그리고 그의 문필력을 감안하여 작가로 대우한다.

물론 이러한 견해는 그가 기록한 것으로 믿는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의 기록 자료가 중심이 된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께서 활동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으나 그들을 미완의 상태로 남기시고(요 16:12) 떠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성령시대의 토대를 말씀하셨으며, 드디어 성령의 이름으로 오신 것을 알 수 있다(행 1:4, 1:8, 요 16:13, 행 2:1∼).

성령으로 오신 후 예수의 부활의 구체적 진실(요 20:1∼29, 마 28:1∼, 막 16:1∼, 눅 24:1∼47, 요 21:1∼24, 25, 행 2:1∼) 성경 기록으로 낱낱이 드러났다.

그러나 성경기록은 AD 60년 대 이후에 나타났으니, 이 기록들의 전후 과정을 신뢰하면서 우리는 예수의 생애는 물론이고 특히 중요한 성령강림 초기의 정황을 살펴야 할 줄 안다.

앞에서 말한대로 성령강림은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오순절에 이루어졌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사도들의 움직임은 전적으로 사도행전에 의존하는 점이 본문 자료의 한계를 인정하게 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은 더 이상의 자료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필자는 바로 이 같은 돌발 상황을 '섭리적 차원'으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출현은 '바울'이라 이름하는 사울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 그는 '사울'이라 이름하는 로마제국의 동부에 해당하는 길리기아 다소 출신 유태인으로 그의 부친이 로마 시민권을 가졌기에 그 역시도 그 신분이 상속된 인물로 가말리엘 문하를 거친 메시아 예수 강림기 유대교의 소장 율법학자의 신분이었다.

'섭리적 차원'이라는 비역사적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은 기독교 출현기의 현실을 바울의 영역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맞수 스데반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고, 유대교 기반과 다마스커스에서 예수께 투항(행 9:3∼)하면서 순조로운 '바울의 기독교 시대'를 이루어갔다.


1. 사도행전적 수순에 따라서


바울(사울) 등장 이전 부분을 다시 정리해 보자.

1) 거듭 생각해보는 아나니아 부부
그들의 거짓말, 특히 성령 하나님을 속이는 행위를 동정적으로 보아 넘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나님의 법의 엄중함을 신뢰하고 싶으며, 율법의 단 한 점에 대해서도 적당히 대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사도행전 5장을 독차지 하고 있는 베드로와 아나니아 부부의 비극적 만남은 피할 수 없었던 사건일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이 오셔서 제자들의 불신앙을 바로 잡아주시고, 겁쟁이 베드로가 예수께서 잡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심문 받으실 때 보여주었던 비겁함(요 18:25∼)과는 전혀 다른 영웅적 모습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등 참으로 화려한 모습 변화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행 2:44∼47, 행 3:1∼, 행 1∼31, 32∼37).

한 번 설교에 3천명 구원, 다시 설교하여 2천명, 그리고 앉은뱅이를 고치고, 특별히 베드로의 위력은 믿는 사람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시도하게 한 기록(행 2:43∼47, 행 4:32∼37)을 주목한다. 그러나 아나니아 부부사태가 돌발로 드러나면서 돌이키기 어려운 위기를 불러들였다고 보고 싶다.

새로운 공동체, 곧 예루살렘 교회는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여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은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더라'(행 2:44∼47) 하였고, 사도행전 4장 32절 이하에 또 비슷한 말씀으로 예루살렘교회가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곧이어서 아나니아 부부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종종 있을 수 있는 비극적 사건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아쉬운 사태다. 성령 하나님은 자발적 헌금이나 헌물 앞에서 그것의 절반을 부풀렸다고 부부를 동시에 즉결처분 하실 수도 있을까? '성령 훼방죄'라고 토를 달기에는 조금은 무리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거부하는 수준이 아닌 나약한 믿음의 상태에서 저지른 거짓말 한마디가 한 부부를 죽음으로 몰고 갈 만큼일까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혹시 베드로의 '미숙한 목회관리'가 빚어낸 사고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2) 아나니아 부부 사건과 스데반 순교의 관계
성령시대 초기에 나타난 여러 가지 장애요인이 있을 수 있다. 제자들의 감격, 예루살렘의 반응, 그에 따른 신·구 이스라엘 소망간의 갈등 또한 작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의 메시아 복음, 그의 3년 공생애를 통한 복음의 완성도는 '기다림의 복음'이었다. 그의 죽음은 형벌이 아니기에 죽음을 이기시고 승리해야 하는 부활 시간의 기다림이요, 성령 하나님이 역사 위에 등장하시는 시간까지의 기다림이요, 성령 하나님의 전(全)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교회의 기다림'까지 메시아 예수의 지상생애는 오로지 기다림이었다.

그런데 '교회 공동체'의 완성도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더 말할 필요 없이 아나니아 부부의 '희생' 또는 '살해'이다. 앞서도 말했으나 사도행전 2장과 4장 부분에서 교회 공동체의 수준 높은 가치가 완성 지점을 향해서 가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 터진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헬라파와 유대파의 갈등과 사도들이 대제사장 세력들로부터 능욕을 당하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난다. 다시 이어지는 '일곱 지도자'의 충원을 통한 교회 조직 강화 과정에서 스데반의 등장은 예루살렘 옛 주인 세력인 유대인들과 제사장파를 크게 긴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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