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도봉동 소재 자택에서의 함석헌 선생.


함석헌에게는 이미 농사와 교육과 신앙을 하나로 묶은 공동체를 통해서
망해버린 나라를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명(mission)'이었다고 까지 단언한다


죽기로 사는 사람

뒷줄을 끊어버린 사람! 예수가 그랬던 것 같이 함석헌이 그랬다. 악의 세력이 걸음걸음 접근해올 때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 그것은 곧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살아남는 몸이란 절대의 혼이 빠져버린 고깃덩이일 뿐이다. 역사진화의 절대조건은 '참', '뜻'에 제물로 드려지는 인격이다. 이른바 죽기로 사는 것 말이다.

진화라 하지만 거저나 저절로는 없다.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말처럼 잘못 쓰이고 있는 말이 또 있을까? 특히 한국기독교에 하나님의 '말씀'이 어처구니 없을 만큼 오도되고 있다하면 과연 왜일까?

'십자가로 가까이'를 두 무릎, 두 손 모아 노래하면서, 외치면서 사실은 천시, 천대하고 있지 않는가? 철저히 버려지고 밟혀지고 있지 않는가? 대교회란 바로 그 전형 아닌가? '하나님이 주셨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말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서만, 내가 그의 아들 예수의 삶을 모본으로 하는 자리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다.

필자가 함석헌이라는 인격을 생각할 때마다, 그같은 인격과 한 세대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주신 하늘에 감사를 아니 드릴 수 없는 것은 역사의 마디마디에서 그가 통체의 제물로 드려져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그가 살아내야 하는 역사 앞에서, 그 역사를 살아내기 위하여 '뒷줄은 끊어놓고'라고 했지만 그의 90년사를 점점이 짚어보면 그에겐 처음부터 뒷줄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타락한 국가권력, 타락한 교권은 물론, 암흑 세계의 지배자들, 하늘 악령들과의 싸움에서 그의 자세는 언제나 '죽기로'일 뿐이었다. 함석헌으로 뒷줄이 필요없게 한 것은 그 안에 깊이 자리잡은 하나님으로서의 '참'이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오산(五山)은 〈선한목자〉를 자임할 만큼의 생명성(生命城) 같은 목장이었지만 이제 그 오산에 더이상 몸 붙여 있다는 것은 뒷줄을 붙드는 것이요, 그것은 그가 몸 전체로 섬겨온 그의 하나님 참, 뜻에 반역하는 것이었다.

오산을 떠나던 날, 그의 가슴엔 만공(滿空)의 하늘에 못지않는 한 신비의 하늘이 펼쳐지고 있었고 그 신비의 하늘엔 더할 수 없는 고요, 더할 수 없는 평화가 흐르고 있었다.

오산학교를 떠난 것

함석헌이 조산말로 조선역사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을 때 누구에게 의논도, 누구의 조언도 없이 오산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누가 뭐라거나 그것은 하늘이 함석헌에게 내린 위대한 축복이요, 사랑이었다.
함석헌의 연구가인 이치석은 함석헌의 이 오산학교의 떠남을 '옷을 갈아입는' 경우로 비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함석헌은 이제 그 옷을 벗기로 한 것 뿐이다. 그동안 비록 탁월한 교육자의 기질이나 천재적 사유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역사선생의 옷을 입은 함석헌은… 장차 새로운 맨사람, 씨알을 만나기 위해 이름 없는 옷으로 갈아입는 편이 순리 같았다”(이치석, 「씨알 함석헌 평전」 시대의 창, 2005, p.250).

한국사 속에서, 세계사 속에서 함석헌의 삶을 말할 때 그 누구도 빠트려서는 안될 내용이 함석헌의 오산과의 결별을 '맨사람, 씨알을 만나기 위해서'와 '이름 없는 옷으로 갈아입는'이라는 두 마디일 것이다.

함석헌의 종교, 사상, 철학은 물론 그의 전 삶이 이 두 마디 속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철학, 함석헌의 종교적 사상이 아무리 심오, 고매하다 해도 그가 만난 '씨알'과, 그 씨알과 더불어 사는데 절대의 조건이 되는 '이름 없는 옷'이 아니었다면 함석헌 역시 씨알과의 관계에서 너는 너, 나는 나로 끝나버렸을 것이다. 함석헌이 오산을 떠난 것은 함석헌 자신은 알았거나 몰랐거나 거룩한 뜻의 역사와 작용에 의해서였다. 그의 이후 씨알과의 만남, 씨알로서의 삶, 이름 없는 옷의 착복(着服)을 두고하는 말이다.

이어 지키는 오산


오산학교를 떠난 함석헌은 오산을 떠날 수는 없었다. 지난 10년 함석헌의 오산의 살림살이는 정말 '살림'을 이루기 위한 살이었다. 생(生)을 제사로 믿고 살아온 함석헌이었는지라 그 땅 오산엔 그의 발걸음 걸음마다 죽을 만큼의 무게가 실려있었다. 함석헌에게 있어 오산은 그래서 지극히 존엄한 곳이 아닐 수 없었으며 떠날 수 없는 땅이 되어 있었다.

그의 사저(私邸)는 학교와 엉킨 하숙마을에서 별로 멀지않은 언덕 하나를 넘어내리면 용동(龍洞)이라는 마을인데 그 마을에 미치기 전 바로 언덕기슭에 자리잡은 꽤 큰 과수원이 있고, 그 과수원 복판에 자리잡은 길죽한 '_'자형(字形) 집이었다.

함석헌에게는 이미 농사와 교육과 신앙을 하나로 묶은 공동체를 통해서 망해버린 나라를 살려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후에 함석헌은 이 셋을 묶은 공동체를 이루는 일을 자신의 '사명(mission)'이었다고까지 단언한다(I considesed this as my mission, Ross 「Kicked by God」 the wides fellowship, 1969, p.13).

그것은 그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이래 10년 동안 끊임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키워온 생각이었다. 그랬던 함석헌에게 오산학교에서의 퇴교는 바로 그같은 공동체의 시험에 돌입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오산학교를 물러난 것, 차라리 잘됐다 싶기까지 했다. 이제 그는 그만의 일터를 갖게 되었다. 퇴교 당한(?) 바로 그 다음날 함석헌은 그의 집을 재정리 하기 시작한다.

“열심히 농사를 지으면서 주말이면 예배와 신앙, 역사와 생활교육을 계속하리라.” 학교를 떠났다 해도 자신을 찾아올 사람들, 학생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천연히 믿어졌고 그래서 그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용동(龍洞)골 함석헌네 과수원  '_'형(形)


그의 사저는 그 자신의 손으로 지어졌다. 주말이면 제자들과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도움의 손을 더러 주곤 했지만 대체로 혼자서 해낸 집짓기였다. 처음엔 400여 평의 땅이었던 것이 이제는 3000평이넘는 과수원이다. 400여 평의 땅은 그가 동경고사를 마치고 오산에 부임해 오자마자 준비한 것으로 처음엔 아버지의 지원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함석헌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처음부터 사저를 공적(公的) 건물로 생각하고 지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_'자형 사저는 실로 거룩한 성전(聖殿)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_'자형의 그 집은 두세 해에 걸쳐 두고두고 지어진 집이었다. 집 모양이 _자형이었기 때문에 건축엔 큰 문제가 없었다. 목수와 석수, 토수들의 약간의 손을 빌려 기술적인 부분을 해결하고 나면 대부분은 틈틈을 이용해서 함석헌 손 수 집을 만들어 갔다. 집은 처음부터 _자형으로 설계했다. 그의 평생의 삶이 그랬듯이 오산학교에 부임하면서 '여기서 내 생을 마치리라' 했던 그였는지라, 그의 인생관이 그의 자가설계에 그대로 배어들었다.

집 짓기는 _자형이었기 때문에 어렵지 않았다. 처음엔 우선 의식주 생활공간을 짓고, 이어서 서재를 짓고, 오산교회로부터 이단으로까지는 아니었다해도 교회 밖의 사람으로 규정(?)되면서 강단에 서는 일, 곧 성서의 민중교육이 불가능해지자 예배실과 공적모임실로 사용할 공간을 또 이어냈고, 농산물 저장간도 이어붙였다. 지붕은 이엉이 아닌 슬렛트였다.

이렇게 해서 함석헌은 결코 평수로는 적지않은 주택을 장만해 가진터라 자신을 찾아 모여드는 이들과 함께 하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렇게해서 하나님과 사이에 약속된 새 역사를 열기 위한 함석헌의 살림이 시작된다.

새벽 네시경, 어쩔때 두세시, 깊은 잠 깨어나 찬물로 몸을 씻고 나면 조용히 책상 앞에 무릎을 끊는다. 오산을 떠난 이후 그가 입는 옷은 언제난 흰옷이었다. 춘하추동 흰옷만 입는 이유를 누가 물은적도 없고, 누구에게 말한적도 없었지만 그의 흰옷은 신앙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르치는 일이 없는 날은 이른 새벽부터 밤 하늘의 별을 보기까지 과수원과 논밭에서 흙일로 날을 보내는 그였지만 흰옷은 그에게 마치 유니폼과 같았다.

그의 아내의 그 뒷 시중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추측케 한다. 오산학교 10년 동안도 그의 교직생활은 구도자에 가까웠다. 그의 집에는 늘 4∼5명의 하숙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 학생들 역시 함석헌이 새벽 찬물욕을 한 후 갖게되는 기도모임에, 일요일이면 함석헌이 인도하는 예배에 정성들여 참여해야 했다. 학생들로는 윤창흠과 그의 동급생들과 후배들이 10여 명이 있었고, 그의 선배급들이 4∼5명, 장년들도 이찬갑(사학자 이기백의 부친), 최태사 등 20여 명 가까운 무리들의 모임이 계속되어 왔던 터, 이제는 정말 함석헌이 학교일 마저 벗어버리고 전력투구 할 터이니 그가 그의 손으로 지은 용골 '_'집은 법궤를 모시는 성전(?)으로 새옷을 입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 태어난 함석헌에게 있어 이 용골의 '_'자 집은 성서연구와 사색으로 그야말로 맞춤집이었다. 성서를 보는 함석헌만의 눈, 함석헌의 해석, 함석헌만의 해설은 그를 찾는 혹은 거쳐가는 크고 작은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과 각성과 생(生)에의 경외를 체험케 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 한국역사〉의 탯집

그의 저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가 공지에 나타난 것이 1934년 성서조선을 통해서인데 2011년 이제에 이르기까지 70수년을 넘어 80년 가까운 세월동안 계속 발행되고 있어 머지않아 1세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조선역사의 사관(史觀)을 움직일 수 없는 감히 '진리'라고 일컬을 만큼 확신(Sipmly decided)에 이르게 한 곳이 바로 이 용동변 낮은 산 언덕에 자리잡은 그의 '_'자형 과수원 집이었다. 일본 관원들의 의심의 눈길이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오산학교 사임 후 너무도 철저하게 농사꾼이 되어버린 함석헌을 직접적으로 괴롭히지는 않았다.

정말 함석헌은 흙 살이를 생업으로 하는 농삿꾼이 되어 갔다. 함석헌에게는 “우선은 어쩔 수 없이 이걸 하다가 때가 오면 큰 일을 하겠다”는 따위의 생각이 틈탈 수 없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해야 할 일이요,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일로 믿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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