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19)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카타콤 시대의 연장선에서 볼 때 기독교는 차츰 사상적 틀을 만들기 위해서 고심하게 된다. 로마제국의 황금기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치세에 기독교는 사상적 몸부림을 한다. 성령강림 후 50여 년 로마교회도 활발한 세력 확대를 노린다. 그러나 얌니아 회의(AD 90) 후 유대교가 자기 갈 길을 가면서, 초대교회와 결별하면서 기독교 또한 바쁘게 되었다.

기독교는 스스로의 힘을 필요로 한다. 그 순간 내게 힘이 너무 없구나를 깨닫는다. 더구나 영지주의(Gnosticism)와 에비온 주의((Ebionism)가 골치였다. 이들은 헬라주의와 유대주의의 형태이기도한 사상체계로서 기독교의 숙적이었다. 이들을 상대로 기독교 사상가들 또는 변증가들이 일어나서 순수한 하나님의 교회를 지켰는데, 여기서 우리는 서로마 대표 변증가로 순교자 저스틴((Justine Martyr, AD 100∼165)과 동 교회 대표 변증가로 타티안(Tatian, AD 110∼172)을 내세우겠다.


1. 서로마 변증가들


저스틴보다 앞선 인물들이 여러명 있다. 그들 중 아테네의 쿠아드라투스(2세기 초), 아리스티데스(2세기 초)가 돋보인다. 쿠아드라투스는 변증가들의 아버지라 해도 될 만큼 뛰어난 활동을 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구세주 되심에 대한 증언을 위주로 투쟁했다. 변증가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핍박시대 한복판에서 로마 황제에게 정면 도전을 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쿠아드라투스의 활동으로 교회들이 평정을 찾고 신자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무렵 아리스티데스가 나타나 피우스(AD 138∼161) 황제 앞으로 그가 작성한 변증서를 보낸다. 물론 그는 피우스의 직전 황제인 하드리아누스에게도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아리스티데스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보낸 변증문에서 참된 신의 속성을 설명하고, 이교도들의 신화를 공격하고, 기독교 신자의 올바른 모습을 제시했다. 아리스티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체계를 따랐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증거와 이웃에 대한 존중의 관계성을 강조하면서 하나님은 이름도 없으시고 끝도 없으시다, 그래서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없다고도 하였다.

그는 인간을 야만인, 헬라인, 유대인, 기독교인으로 구분하고 그 중 기독교인을 가장 고차원적이며 참 진리의 증인들이라 하였다. 그리고 변증시대의 인물인 순교자 저스틴이 등장한다. 그는 변증사에 유명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 변증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초기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그에 대해 말하기를 '변증시대의 가장 뛰어난 인물'이라 했다.

저스틴은 네아폴리스(현 나불루스) 출신 이방인의 아들로서 무 할례자였다. 그러나 그에 대해 철학자 출신으로 참된 진리를 찾아다닌 철학의 유랑자라는 표현을 해볼 수 있다. 그는 진리를 찾아서 스토아 철학 유형들, 소요학파 등을 거치고 플라톤 학파에 이르러 철학적 정착을 하게 된다. 이 무렵 그는 기독교에 눈을 뜨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철학화 하는 인물이 되었다.

저스틴은 변증가 활동을 시작한 후 황제 앞에서도 당당하게 변증을 하는 인물이었다. 드디어 그는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로고스의 충만을 통해서 구약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주장했다.

저스틴은 노년기에 이르러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하였다. 그의 제자 중 앗시리아 출신 타티안을 주목해야 한다. 그는 저스틴 후기에 페르시아로 건너간다. 그리고 그는 동 교회(The Church of the East)를 대표하는 지도자가 된다.

저스틴 이야기를 한마디 더 해본다면, 그는 마르시온과 큰 싸움을 했다. 영지주의자 마르시온. 저스틴은 구약의 성취로서의 신약을 말하여 구약과 신약의 소중성을 강조했으나 영지주의자 마르시온은 신구약 성경은 상호 모순되는 경전으로 구약 무용론을 제창했던 이단자였다. 저스틴은 마르시온을 견제하고, 적극적으로 마르시온의 교훈이 기독교 내부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저스틴은 기독교 변증시대의 대표적 인물이면서도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가 부정적 평가를 받는 부분은 논리의 일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플라톤주의와 기독교의 친밀성에 너무 깊숙이 빠져들었으며,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명쾌하게 해석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사도 바울 이후 최초의 사상가로 평가를 받기도 했다.


2. 동 교회의 변증가 타티안


2세기 중반 기독교의 주요인물인 타티안은 서로마 권 기독교를 떠나 페르시아로 활동지를 옮기면서 기독교의 이단적 인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 잠시 설명해야 할 중요사안이 있다.

세계기독교의 출발지가 예루살렘, 즉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현장이 됨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성령강림과 함께 교회가 탄생한다. 그때(행 2:1∼) 그 자리에 모인 종족들의 구성으로 유럽계와 범 아시아계를 비교하면 2:8정도, 즉 아시아계가 80% 정도가 된다.

여기서 타티안을 취급하면서 현재 세계기독교 역사학에 대한 반성을 해본다. 세계사라고 하면 크게는 유럽 기독교와 아시아 기독교 양대 축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역사의 영고성쇠 과정에서 로마 가톨릭이 혼자 남아 있다가 16세기 초 기독교혁명(AD 1517년 10월 31일) 출발선에서 기독교 신교가 등장한다.

그러나 6세기까지 세계기독교는 예루살렘 교구, 알렉산드리아 교구, 로마 교구, 안디옥 교구, 끝으로 콘스탄티노플교구가 있었다. 이들 5개 교구는 모두 거룩한 보편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로 불리었다. 이들 중 AD 637년 예루살렘교구와 안디옥교구, AD 640년 알렉산드리아교구, AD 1453년 콘스탄티노플교구가 각각 이슬람에게 멸망하여 문을 닫았고, 홀로 로마교구가 살아남아서 기독교를 대표해오다가 AD 1517년 루터 등 개혁자들에 의하여 기독교 신교가 탄생한다.

그리고 기독교 역사책을 펴면 서로마교회, 동로마교회로 분류하는 경우는 로마제국 동서지역성에 따라서 표기하다가 동·서로마교구가 결별했던 AD 1054년을 기준으로 서로마, 동로마교회로 구분한다.

그리고 앞서 타티안을 말하면서 '동 교회'라고 했는데 이는 로마제국 영향력 밖의 교회 또는 기독교를 말한다. 지역으로는 수리아, 앗수리아, 아르메니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 서남아권으로 '기독교 찬밥지역'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로마제국이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중심(AD 313년)으로 체제의 가닥을 잡은 후 로마제국과 쌍벽을 이루던 사산조 페르시아권이 긴장하기 시작했고, 데오도시우스가 기독교 국교 선언(AD 392)을 하면서 범 페르시아, 또는 범아시아의 기독교는 장기 시련기로 들어간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계사는 성령강림 이후 전 세계적인 포부를 가지고 출발했다. 중세 이후 기독교의 중심세력을 형성한 로마(가톨릭)교회가 가톨릭식 또는 유럽식 기독교 역사를 기록했고, 종교개혁을 했다지만 기독교가 역사의 독립(개혁)을 못해서 기독교 신교는 세계역사 기록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하다. 이토록 위축된 세계기독교 역사를 바르게 잡아서 세워보고자 하는 필자의 고충과 수고가 독자들의 격려를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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