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씨알의 소리〉 편집장 박선균(오른쪽), 백청수(왼쪽) 님과 함께 한 함석헌 선생.

송산(松山)학원

역사의 제물로 운명지어진 '함석헌의 나라'가 열려오기 시작한다. 함석헌이 이제 '평양의 송산'을 향해 오산을 아예 떠나게 되는데, 필자가 송산(松山)을 '함석헌의 나라'라고 표현한 것은 그곳이 함석헌의 인생살이 90평생에 유일하게 그의 이름으로 가져본 꿈의 터전이었다는 것 때문이다.

함석헌은 송산을 향하면서 전신을 떨었고, 떨면서 갔다. 송산, 그곳은 실로 그에게 약속의 땅이었다. 국가권력으로 일으켜지는, 군사과학 산업기술 등으로 일컬어지는 모든 힘들(The age of great powers)을 다독여 새 한세계를 지어낼 약속의 땅이었다.

“어떤 힘의 광란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성서신앙(聖書信仰)과 세계를 한 나라로 고백하는 인격으로의 교육(敎育)과 언제나 살림에 당당할 수 있는 '내 밥그릇'으로의 농사(農事)를 하나로 묶은 공동체를 이루어 가겠다”는 꿈을 지녀온 함석헌에게 있어 송산은 바야흐로 그같은 이상을 실현할 약속의 땅으로 펼쳐져 오는 곳이었다.

약속의 땅으로서의 이 송산은 함석헌 자신의 말로 “송산농사학원은 소위 내 운동이라 할만한 운동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라고 전해지고 있다. 그것 역시 6개월을 못가 당국에 의해 폐교되었지만…. 그래서 필자는 평양의 송산을 '함석헌의 나라'라고 한것이다.

함석헌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하게 한 이 땅의 초석을 놓은 사람이 이미 말한 김태훈과 최태사였다. 함석헌과 최태사의 인간적·정신적 관계는 최태사의 고희 기념문집 〈나의 소원은 평화〉의 '책머리에 써부치는 말'(함석헌의 글)을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려 한다.

최태사의 함석헌의 송산 뒷시중

“최태사는 나와 한가지 오산(五山)의 동창이다. 그때 우리는 곧 잘 이런 노래를 부르곤 했다.

   금풍은 소슬하고 달은 밝은데
   북방으로 날아오는 기럭소리는
   만추(晩秋)의 소식을 전해주는데
   아아 우리 부모형제 안녕하신가.

그때는 만주, 시베리아에 망명간 동포를 생각해서 울었지만, 지금은 우리 자신과 우리 집안 사람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 최 원장은 가난한 집에서 났고 자그마한 몸집에 말 적고, 한마디로 온순 그대로의 성격으로 이북에서나 여기온 이후나 다름없이 자기 한몸을 자기 손으로 닦아올린 참의 사람이다. 거기 있을 때는 학교에서 경영하는 병원의 약제사로 일했고, 남으로 온 후에는 순전히 혼자 공부하여 의사의 자격을 얻었고, 내가 아는 한은 부산의 장기려 박사를 내놓고는 오직 봉사의 정신으로 의사노릇을 하는 분이다. 나는, 내 개인으로는, 그는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가 일생을 거기서 늙을 줄 알았던 오산 모교(母校)를 나와서 차마 오산을 떠날수 없어 두 해를 머물러 있다가 종래 주위의 사정이 허락되지 않아, 평양시 외에 남이 하다가 내버리는 덴마크식 국민고등학교를 맡아가지고 가려할 때에, 값이라고는 할 수 없는 많은 돈을 내놔, 내 살던 집과 학생 기숙사를 맡아주어 내 길을 열어준 것도 그요, 해방 후 모든 일 뜻과 같이 되지 않아 공산당에게 지주로 숙청을 당해 나와 내 갈길이 막막해 졌을 때 모든 계획과 비용을 스스로 담당해 나로 하여금 죽음의 38선을 무사히 넘게한 것도 그요, 60년대 들어 내 잘못으로 소위 60년 모래위에 쌓았던 탑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십자가도 소용 없고, 나무아미타불도 다 빈 말'이라고 슬픔에 빠졌을 때 남이 다 돌아서도, 변함없이 나를 찾아와 눈물로 위로해 일어설수가 있게 한것도 그이기 때문이다.”

최태사가 함석헌을 기렸듯이 후에 최태사를 기리는 이들이 적지않게 있어, 그들이 최태사를 중심으로 '일심회(一心會)'라는 조직을 만들게 되었는데, 함석헌은 최태사의 문집에 부치는 말의 마지막을 이 일심회의 예찬으로 맺고 있다.

“그렇지만 그의 가장 의미있는 일은 역시 일심회의 조직이다. 일심(一心)이라는 그 말부터가 좋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오산경가(五山景歌)의 한 절을 생각한다.

 
   악이어든 무엇이나 무너트리고
   선이어든 어디서나 일으키면서
   바람부는 들에서나 물결에서나
   우리들은 언제든지 오산이로다

지금은 아직 악이 판을 치지만 이 세상을 건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한마음밖에 없을 것이다.”

함석헌이 송산행을 결심했을 때 현실적으로 절대 중요사가 함석헌의 집과 학생 기숙사로 쓰던 건물, 그리고 적지않은 땅의 과수원을 어떻게 처분하느냐는 것이었는데, 이를 최태사 자신이 시세에 넘치는 값으로 인수하여 함석헌의 뒤를 더할 수 없이 가볍게 했다. 최태사의 그 거금이 선뜻 함석헌에게 전해지게 된 것은 그의 아내의 뜨거운 요청에 의해서였다고 전해진다.

송산의 현황

함석헌이 교장으로 취임한 학교의 정식 명칭은 '송산고등농사학원'이었다. 약 5,000여 평의 땅에 과수가 주를 이루고 있었고, 재학생은 모두가 13명이었다. 학교의 인수(引受)는 김태훈을 비롯한 동경 유학생들의 모금으로, 학교운영과 가사는 최태사의 큰 도움으로 거머쥔 적지않은 기금이 있어 문제될 것이 없는 듯 했다.
오산학교 10년을 지내면서 자신이 할 일로 서원했던 신앙과 교육과 농사를 묶은 공동체가 비로소 그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함석헌이 들어선 송산농사학원은 새옷을 입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수업은 학교의 설립자였던 김혁과 함께 담당했지만 함석헌이 그 경영을 맡은 후 김혁이 2∼3개월 후 동경농대 진학을 위해 도일하게 되면서 함석헌은 모든 수업을 전담하게 된다.

함석헌이 맡은 농사학원의 수업과목은 역사, 국어, 한문, 고등원예 등이었는데 김혁이 떠나면서 그가 맡아하던 축산, 생물까지를 도맡아야 했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있어 어떤 과목, 어떤 시간보다도 신비감을 지니게 하는 시간이 '새벽기도회'였다. 모여든 학생들의 대부분이 정통적 장로교회, 특히 엄격한 교리와 그 교리에의 순종을 요구하는 조직 속에서 그 신앙을 키워온 학생들이었다.

교회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구원받은 공동체로, 그 예수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지켜나가면 죽은 후엔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된다는 신앙(?)을 거의 체화해온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이 청소년들에게 교장선생님 함석헌은 달라도 너무 다른 선생이었다.

아직도 동녘이 밝기 한참 이전, 학생들이 예배실문을 열고 들어서면 이미 예배준비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고, 함석헌은 무릎을 꿇고 고요속에 있다.

선생 함석헌은 도대체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이 없었다. 찬송은 함께 소리내어 부르곤 했지만 소리내어 하는 공중기도는 아예 없다. 학생들은 답답하고 무거웠지만 별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함석헌의 '말씀'시간이었다. 말이 다른 것이다. 깊고 큰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 같은, 어떤 험한 길을 같이 걸어주는 것 같은, 그러는가 하면 이상스러우리만큼 어두운 가슴을 뒤흔들어 신심(信心)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오전까지 수업을 마치면 오후에는 농사일을 하는데, 일을 하는 선생 모습 또한 그랬다. 이미 오후에 할일은 '작업표'에 다 작성·배포되어 있는 터, 함석헌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그 일을 할뿐이었다. 학생 중 하나로 후에 그의 셋째 사위가 되는 최진삼 장로(안암성북교회 출신·현 LA에 거주)는 “선생님을 만난 이후 나는 내 인생의 목표도, 기도의 내용도 달라지게 되었다”고 증언한다(다시 그리워지는 선생님, 한길사, 2001. 4. 20).

아이들이 치고받는 싸움을 해도 함석헌은 자신의 방에 들어가 몇시간씩 문을 걸어 잠그고 있거나 단식을 하거나, 대처하는 방법은 동일했다. 이제 함석헌에게 학교생활에 재미가 붙기 시작한다. 아이들이 새로워져 가는 모습이 완연하고, 농장이며 학교도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간다. “내년(1941년)에는 학생 모집도 더 해야겠고, 선생도 한 사람쯤 초빙해야 한다. 이 송산이 밑자리가 되어….”

이미 유년기에 자신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그의 하나님과의 약속임을 고백해온 함석헌인지라, 송산학교에 부임해온 이후의 모습, 이후의 하루하루는 접전(接戰)이라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가열찬 것이었다. 이제까지의 것과는 전혀다른, 엉뚱한 새것을 갈망하는 그였기 때문에 그의 살림살이 또한 그래야만 했다.

오후 농사하는 시간이 끝나 학생들이 방과한 후면 오히려 이때부터 함석헌의 대접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몸을 씻고, 아내가 준비해 놓은 저녁식탁에 앉기까지 농장의 돌들을 주워내는 일, 잡초를 제거하는 일, 농장경계에 새 식수(植樹)를 하는 일, 그렇게 몸살이를 해도 그는 전혀 지칠줄을 몰랐다.

스승 유영모의 편지

송산은 그의 땅, 아예 세계의 역사를 새로 지을 땅, 여기는 함석헌의 땅, 게다가 민족의 미래, 특히 한국 농촌의 미래를 걱정하는 젊은이들이 부지런히 찾아주는 것은 더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함석헌에겐 이런 모든 이들이 이제부터 새 세상을 열어갈 동력들이요, 동지들이었다.

하루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송산을 허락하신 그의 하나님께 지극한 감사를 드렸다. “내가 이 송산을 밑자리로 새 세계를 그리리라”.

이 무렵 함석헌은 그가 '선생님'이라 부르는 다석 유영모로부터 한통의 편지를 받는다. 함석헌이 오산학교 재학중이던 1922년, 오산학교에 교장으로 왔다가 총독부의 발령거부로 1년여 만에 다시 학교를 떠나게 되는데, 학교에서 10여리 길이 되는 고읍역까지 함석헌은 다석을 배웅하게 된다.

함석헌에게 있어 다석 유영모는 정확하게 그가 그리고 있는 새 세상 만큼이나 새로운 사람이었다. 이제까지 살아온 살림살이를 근본적으로 고쳐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 이였다. 함석헌에게 사람이 이르러야 할 마지막 자리가 '참'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이 역시 유영모였다.

후에 함석헌은 “선생님을 고읍역까지 배웅하는 길에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어둠이 빛보다 크다'는 것이었는데 그때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몰랐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후 20여 년이 다 된 이제 함석헌이 그의 편지를 받게 된 것이다. 20여 년 전 함석헌과의 고읍역으로의 동행을 떠올리면서 유영모는 다시 그때 함석헌에게 들려주었던 '어둠이 빛보다 크다'는 말을 풀어 밝힌다.

“함 형(兄)께.

근 이십년전에도… 오산서 고읍역까지 형이 나를 냄 내여줄제, 제(弟) 해방을 빳이며 이야기했습니다. '어둠이 분명 빛보다 크다'고. 그러나 담대하게 단정치는 못하고 이때까지 왔던 문제입니다. 오늘 당하여 보니 제(弟) 어둠을 스려하기 보다 빛에 혹(惑)함이 많았던 탓이었습니다. 무사(無事)만 하고 보면 암흑이나 사망의 두려움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빛을 기(忌)함은 사람의 것(物貨)을 도적하는 자이지만, 어둠을 기(忌)함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하라는 자(생명을 私有하라는 자)입니다.”

“…….”

함석헌은 할말을 잃었다. 아, 어둠! 유명모의 말은 함석헌에게 형언하기 어려운 묘운(妙運)을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복음인in 들소리>는 하나님의 교회다움을 위해 진력하는 여러분의 후원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동반자로서 여러분과 동역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함께 하겠습니다. 샬롬!

후원계좌 : 국민은행 010-9656-3375 (예금주 복음인)

저작권자 © 복음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