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6)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AD 325년 로마제국 교회는 니케아(현 터키의 이즈닉)에서 제 1차 회의가 열렸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통일 황제가 된 이후 12년 차에 제국 안에 있는 교회가 각 지역 별 신학적 차이로 말미암은 분쟁과 분열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의 포부는 제국은 하나, 황제도 한 사람, 교회도 통일 된 신학의 터 위에서 하나를 지향했다. 그러나 300여년 역사를 가진 교회는 여러 형태의 신학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양성론과 단성론 갈등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그 성격을 말하고 그로 말미암은 삼위일체 신학의 성립과 불성립의 갈등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기독교 세력의 약화를 가져왔다.

특히 아리우스의 기독론 논쟁은 AD 318년부터 AD 325년 공의회 개회 때까지 불꽃처럼 뜨거운 대결이었다. 그 초점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었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위협을 받을 경우, 기독교는 결정적 위협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파의 신·인 양성론, 신성의 불분명한 태도를 지닌 아리우스파와 중간파가 형성되었다.

황제가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제국 산하의 교회 감독들을 니케아(황제의 별궁)에 초대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 제위 20주년(부황제에 오른 AD 305년부터 계산)에 제국 내 감독(주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황제는 모든 참석 감독들에게 교통편을 제공하고, 2명의 장로, 3명의 하인을 대동하고 오게 하였고 니케아 체류 비용과 오고 가는 여행비 일체를 국고에서 지원했다. 그러나 참석 대의원(감독) 숫자가 겨우 368명이었다.(제국 전역의 감독 숫자는 대략 1천 8백 명 정도였다.)

황제 입장이 있기 전, 먼저 입장한 대의원(감독)들, 황궁 대신들도 참석했다. 드디어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등장한다. 교회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이 대목을 이렇게 묘사했다.

“황제의 도착을 알리는 신호가 있자, 장내에 있던 모든 참석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으며 황제는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사자처럼 금과 보석으로 치장한 훤칠한 키에 날씬한 자태요, 경건하고 힘찬 모습으로 입장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불과 몇 년 전까지 만해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일어나서 라틴어로 말하고 헬라어로 통역했다.

“친애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의 의에 참관 할 수 있도록 허락 받는 일이 큰 소원이었습니다. 제게 온갖 복들과 아울러 이곳에 협력하여 한 마음으로 모인 여러분을 뵙게 되는 이러한 지극히 큰 복을 내리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후략).”

황제의 연설이 끝나고, 회의 의장단이 회의 진행을 주도했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황제는 회의 진행에 간여했다.


1. 회의장의 세력 균형


1) 정통 신앙 진영:처음에는 약세였으나 진행 과정에서 다수의 중간자들이 가세하여 다수가 되었다.

2) 아리우스파:전체 대의원 368명 중에서 18명의 대의원을 확보한 아리우스파는 아리우스의 적극 후견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와 황제의 위력으로 만만찮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는 황실 교회의 감독으로 아리우스파 지지자였으니 그의 역할은 다수의 정통파를 회의 기간 내내 괴롭혔다.

3) 중간파:가이사리야의 유세비우스가 대변인 역할을 하는 중간파들은 회의 초기와는 달리 정통파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리게네스의 신학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다수 여서 성경을 단순하게 해석하려는 감독들이 많았다. 단순한 해석이란 신학적 깊이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2. 기독론의 본질 토론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으나 사람이신 그가 하나님과 동일 본질(호모시우스)을 가졌다는 주장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제 1피조물이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 가까운 존재라 하여 유사 본질(호모이우시오스)론을 주장하는 범 아리우스파와의 대결이다.

호모우시우스와 호모이우시오스의 대결은 촌보의 양보도 없었다. 이에 교회역사가 유세비우스가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의 안은 니케아 신조와 매우 흡사했다. 다만 헬라어 단어 호모우시오스를 피한다는 조건으로 '동일본질'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중재안이었다. 이 안건에 아리우스도 동의 하였다.

이로써 안건 통과 직전까지 갔으나 '호모우시오스를 주장하는 정통파는 헬라어 양보를 허락하지 않았다.


3. 극적 대 반란


상황이 잘 못 돌아가고 있었다. 신·인 양성론에 동의하겠다는 유사 기독론자들의 양보였다. 단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만 피해 달라는 것이다. 회의장은 피곤한 긴장감이 짓누르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스페인 코르드바 감독(부감독) 호시우스를 준배해 주셨다. 그가 '긴급동의'를 부르짖으며 단상으로 달려갔다. 그는 미리 준비한 니케아 신조를 서기에게 낭독하게 했다. 그리고, 그가 먼저 결의안에 서명하고, 다음으로 감독들의 서명을 요구했다. 이는 한 순간의 기적이었다. 어느 누구도 서명을 피하지 못했다.

승부는 끝났다. 〈호모우시오스 니케아 기독론〉에 끝까지 서명을 거부한 이집트의 테오나스와 세쿤투스, 그리고 아리우스를 제외하고는 모두 서명했다. 이어서 아리우스와 함께 두명의 이집트 감독들은 추방되고, 아리우스의 모든 책들은 불태워지고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기독교의 원수들'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는 제국이 이단을 처벌한 최초의 결의였다.

극적인 반전, 자칫 몽롱한 상태에서 호모우시오스를 잃어버릴 뻔했던 감독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하는 말, '하마터면 내 주님을 잃어버릴 뻔 했네'를 감격어린 마음으로 읊조렸다.

'호모우시오스' 라는 단어에만 신인 양성의 존재가 동일 본질로 성립된다는 어의(글의뜻)가 들어 있다는 것. 그러므로 헬라어에는 기독론을 위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일찍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에큐메니칼 최초의 세계 공의회는 존귀한 공의회이며, 예루살렘 사도 공의회(행 15장)와 함께 가장 중요한 공의회였다. 아타나시우스는 제 1차 니케아 공의회를 말하여 '모든 이단에 대해 승리를 거둔 진정한 기념비' 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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