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로펜의 사마르칸트행 ①


   할머니 알로펜을 아시나요 터키 보스프러스 해협에서 만난 할머니들.

알로펜은 요나와 동무하여 에뎃사로 향했다. 세르기아 목사의 소개장을 들고 에비온 목사를 찾았다. 세르기아의 소개편지를 읽던 에비온 목사는 알로펜을 크게 환영했다.

알로펜은 에비온으로부터 에뎃사의 분위기를 대강 소개받았다. 초기 역사부터 말을 꺼냈다. 예수님의 제자 다데오가 오스로헨 왕국 아브가르 5세 왕의 병을 고쳐준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사도 도마가 경유해 갔으며 AD 280년도에 국교 선언을 했던 아르메니아의 수도가 에뎃사이니 그 자부심이 어떠냐는 등, 에비온 목사의 긴 이야기는 알로펜이 얼마간은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목사님, 저는 기독교의 앞날을 걱정합니다. 초기부터 수리아 안디옥 교회는 헬라파 기독교로서 양성론을 주장하고, 에뎃사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자부심 삼아 꿈이나 꾸고 있는 단성론 기독교들 집합소가 아닌지요?”

알로펜의 이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에비온 목사의 얼굴에 섭섭함이 서려 있다. 그는 알로펜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는데 그 손이 떨리기도 했다.

“이 젊은이가 말버릇 한 번 고약하구먼. 자네가 뭘 안다고 싹둑싹둑 잘라서 말하는 거야. 세상사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야.”

“네,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양성론과 단성론 신학의 간격을 좁히거나 상호존중을 하지 않는 한 장차 큰 비극에 휘말릴 것으로 봅니다만.”

“무슨 재주로 불과 물처럼 존재 자체가 서로 다른 양성론과 단성론의 차이를 좁히고, 서로 존중한다는 것인가?”

에비온 목사가 알로펜의 묵직한 이론에 약간은 수긍한다는 듯이 진지해졌다. 상대를 인정한다는 뜻인 듯 했다.

“목사님, 예수님은 한 분입니다. 그분이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졌다는 학설에 왜 동의를 못합니까? 그분은 분명히 하나님은 내 아버지라 하셨고, 또 나와 하나님은 하나라고도 하셨지요. 단성론의 경우는 무엇인가요? 양성의 조화는 없다는 것이겠죠. 예수는 신이면 신, 사람이면 사람이라는 것인데 복음서 기자들이 말하는 예수, 예수 자신이 소개하는 그분의 모습은 신인 양성을 소유한 당사자라는 표현이 더 정확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저는 학설 자체의 순수성 보다는 로마 본토 기독교와 에뎃사를 중심한 아시아 기독교간의 기세 싸움이고, 자존심 싸움이 그들의 배경에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양측 모두 복음의 핵심에서 빗나간 것이 됩니다.”

“듣고 보니 자네가 많은 생각을 했구먼. 나보다 고민을 더 많이 한 것 같으네 그려.”

“천부당 만부당이십니다. 저는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에비온 목사님의 가르침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를 깨우쳐 주세요.”

“그래, 그런가? 그러나 자네의 말을 듣고 보니 이제는 내가 자네에게 배워야 한다는 솔직한 마음이라네.”

“목사님, 용서하세요. 내가 큰 죄를 목사님께 지었나 봅니다. 그러나 저를 더 이상 내치지 마시고, 현재 에뎃사 교구의 분위기와 네스토리우스의 아시아 교단 현황 좀 가르쳐 주세요.”

에비온 목사는 알로펜의 계속된 사과성 자세에서 그의 겸손이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해 있음을 발견했다.

“고맙네. 알로펜! 자네는 분명 네스토리안 아시아 교회의 큰 인물이 될 것 같네 그려. 내가 있는 힘껏 지원함세.”

“네, 네! 감사합니다. 목사님.”

“나는 말이야. 자네가 지적하는 단성론파야. 2세기 중엽 에뎃사의 큰 인물 바 다이산이나 비슷한 시기의 앗수리아파 타티안의 신학에 동의해 왔어. 그런데 자네가 앞서 말한 것처럼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 신인 양성의 소유자냐의 문제가 중요한 것임이 분명하지만 니케아 종교회의(AD 325년)나 에베소 종교회의(AD 431년) 과정을 지켜볼 때, 특히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를 정치적 장난으로 파멸시킨 로마교회의 행위를 혐오하고 있다네. 신학적 우위성은 교리책이 아닌 인격과 신앙의 품격에서 가려져야 한다고 생각하네.”

“바로 그겁니다. 저도 목사님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는 파문 추방 후에 황제의 사면을 받은 바도 있지만 내가 더 주목하는 것은 칼케돈 종교회의(AD 451년)에서 그가 신앙고백을 했다면 반드시 사면 복권이 되었을 것으로 보거든….”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칼케돈 종교회의(AD 451년)는 네스토리우스를 불러 에베소 종교회의(AD 431년)의 과정을 보고하게 하고, 그의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다시 경청하도록 하고 그에게 초청장을 보냈다는거야. 그런데, 바로 그 직전 그가 세상을 떠난 거야. 안타까운 일이었지.”

“이단으로 정죄되어 추방당한 그 어른이 어떻게 칼케돈 회의에 참석한다는 겁니까?”

“아니야, 네스토리우스를 정죄·추방한 '에베소회의'를 자네가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으나 당시 제3차 에베소 종교회의(AD 431년)는 키릴루스가 돈으로 주물럭거렸지. 그때 키릴루스가 동원한 금은보화는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 했다는 거야(2012년 가치로는 300만 달러 정도이다. 편집주). 키릴루스는 대의원이 다 모이면 1천명도 더 되는데, 겨우 자파 대의원 150명을 앞세워서 회의를 진행한 거야. 자기는 고소자요, 네스토리우스는 피소자이니 그가 회의 의장이 될 수 없는데도 돈으로 그 수작을 했다는 거야. 네스토리우스파 대의원은 한 사람도 없는 회의장에서 일방적으로 처리한 도적회의였어. 아, 참.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자로 쫓겨났는데 어떻게 칼케돈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

“네.”

알로펜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로써는 처음 듣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이단자가 되어 철저하게 차단된 사막을 떠돌면서 살았다는 네스토리우스가 어떻게 황제의 명령에 의해서 소집되는 전 세계적인 규모의 국제회의에 참석한다는 것일까.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는 황제를 끼고 도는 로마교구가 이단으로 만들었지. 교세가 당시 로마제국을 포함하여 소위 유럽파 보다 페르시아를 중심한 아시아파 교회가 훨씬 더 많은 전체의 7할 정도였다는 거야. 아시아파 교회로부터 영웅이요,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는 네스토리우스가 칼케돈 회의장에 들어서기만 했다면 유라시아 기독교 역사는 뒤바뀌었을 수 있었지. 암, 그렇고 말고.”

에비온 목사는 탁자를 두드리면서 마치 그 앞에 키릴루스 대주교가 있다면 주먹질이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저는 이해가 아직도 안됩니다. 그럴 것이면 회의를 더 빨리 열었으면 되지 않습니까. 어찌하자고 교회의 최고 어른인 네스토리우스를 사막의 떠돌이로 20년을 살다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한다는 것입니까?”

알로펜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이 사람아, 울지 말게.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네.”

“그게 뭔가요?”

“황제의 윤허가 없이는 회의를 열수 없었던 거야. 한때는 네스토리우스를 그토록 존중하던 데오도시우스 II세 황제는 키릴루스의 뇌물에 마음이 흔들렸다고들 하지만, 바로 황제가 네스토리우스를 버린 거야. 네스토리우스의 정적 알렉산드리아 키릴루스가 죽은 후(AD 444년) 곧바로 세계 회의를 준비했지. 그런데 그 회의가 불발되었어. 소위 '도적놈들의 회의'라는 수치스러운 이름 하나 더 얻었다네. 그해가 449년, 회의장소는 에베소였어. 그런데 그 이듬해 데오도시우스 II세가 죽고, 그 후임에 마루키아누스 장군이 황제의 위에 오르고, 로마교구 감독이 레오(AD ∼461년)의 주선으로 칼케돈회의(AD 451년)가 드디어 열리게 되었지.”

“그러니까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를 이단으로 만든자 키릴루스가 죽고, 키릴루스의 뒷배 노릇을 했던 데오도시우스 II세가 죽었네요. 그리고 사면 복권이 될 수 있는 그해 AD 451년 칼케돈 회의에 나서려던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가 안타깝게 죽었네요. 아이쿠, 이 세상이란….”

“이 사람아, 흥분하지 말게. 네스토리우스는 오늘 우리가 복권시켜드리는 거야. 자네 네스토리우스가 사막에서 죽어가면서 했던 고백을 아는가?”

“모르겠는데요….”

“바로 이거면 그는 무죄요, 무흠이라네. 그의 신앙고백을 들어보게. 그는 말했어. 나 네스토리우스는 세상 일이 관심없다. 나는 세상에서는 죽었고, 그분을 위해서만 살았다. 인간 네스토리우스는 파문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나를 파문하심으로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했어요.

“그분의 언어가 신선하게 들리네요. 마치 골고다의 예수께서 하신 말씀과 유사하군요. 혹시 그분의 성격의 오만한 것은 아닐지요?”

“아니야, 네스토리우스는 교회의 최고 수장에서 내던져진 후 마치 사막의 짐승처럼 사는 형극의 삶을 20년이나 살면서 죄없이 죽어야 했던 예수님을 깊이 생각했다고 봐야 해요. 바로 이 점이 네스토리우스는 물론 기독교 신자들이면 가져야 하는 체험의 경지가 되어야 할거야.”

“몇달만 더 사셨어도 칼케돈 회의에서 사면복권이 되셨겠지요.”

“그건 모르지. 네스토리우스가 숨지기 직전의 고백이 나나 자네의 귀에는 아름다운 신앙의 높은 경지의 표현이 되었으나, 만약 네스토리우스가 칼케돈회의 증언대에서 똑같은 말을 했을 때 저마다 해석이 다를 경우 또 한번 불행해질 수도 있었을 거야.”

“그렇군요. 그럼 하나님의 섭리는 뭘까요?”

“그것도 모르나! 로마제국에 포로화되어 있는 기독교를 아시아 대륙 전역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그분의 솜씨는 네스토리우스 총대주교가 이단정죄와 추방과 아시아 선교의 출발점이 된 것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네스토리우스가 사막에서 운명하던 그 시간부터 바로 여기, 나와 자네가 머물고 있는 에뎃사에서 아시아 복음이 출발했어. 그해, 451년에 사막에서 죽은 네스토리우스는 곧바로 에뎃사에서 부활하여 현재 1백50여년 동안 아시아 전부는 네스토리우스의 기독교야. 페르시아 일대와 파미르고원 저 너머는 물론 옛 파르티아나 박트리아 지역은 물론 인도에도 복음을 들고 간 선교사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요.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 실크로드의 중간 지점인 사마르칸트에 네스토리우스 교단의 아시아 관구를 설립하고 선교활동을 총지휘하고 있다네.”

“목사님, 감사합니다. 저는 그동안 꿈속에서 살았군요. 양성론이다, 단성론이다 하는 교리시비에 묶여 있었다는 후회가 많습니다.”

“아닐세, 아니야! 자학하지 말게. 자네가 보여준 예수가 누구냐 하는 시비는 자네 스스로 해법을 찾았어요. 내가 볼 때 자네야말로 양성론파와 단성론파 기독교를 함께 이끌어갈 지도력을 발휘할 네스토리안 교단의 미래 지도자 감으로 나는 보고 있네.”

“아이고, 목사님. 과분하십니다.”

“아니야. 내가 사람을 좀 보지. 자네 곧 사마르칸트로 가 주게. 거기서부터 자네가 선교의 방향을 잡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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