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강의(29) - 유라시아 기독교 2000년]

칼케돈 회의(AD 451)는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주체 또는 실재는 신적인 로고스임을 재확증하였으며 동시에 성육신에서 오직 하나의 주체는 두 가지 독특한 존재방식을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리스도는 참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나 그러나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로써 로마교구(교황 레오 1세)는 교리분쟁에서 승리하였으나, 그 승리는 정치적 승리로까지 이어가지는 못했다. 당시 칼케돈 공의회는 법령 제28조에 의해서 콘스탄티노플 교구에게 로마교구와 동일한 특권을 부여하였다(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로마이기에).

더 나아가서 칼케돈 회의에 대한 이집트 교회들의 계속되는 불만으로 알렉산드리아 교구가 몰락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왜냐하면 로마교구의 바라는 바대로 이른바 '칼케돈 공식'으로 불리는 삼위일체론과 기독교론에 알렉산드리아 식 세력들이 동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로마교구로서는 정치적인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기독교)는 로마교구와 알렉산드리아 교구 일부가 주도하여 네스토리우스를 이단 정죄하여 로마제국 영토 밖으로 추방함으로 세계는 크게 네 가지 모습을 갖추게 됨을 본다.


1. 로마교구 탄생


로마교구가 키릴루스 알렉산드리아 주교를 동원하여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를 공략했던 배경을 칼케돈 회의에서 보게 된다. 페르시아, 그리고 그 변경의 감독들은 물론 로마제국 동부, 즉 콘스탄티노플이나 안디옥, 그 주변의 교구들, 그리고 로마교구 내부의 일부까지도 콘스탄티노플과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고 있던 에베소 회의(AD 431년)와 칼케돈 회의를 통해서 네스토리우스를 제거함으로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 교구로 로마 교구 휘하에 두고 싶었던 포부가 제지를 받게 되었다(칼케돈 공의회 법령 제28조에 의해서).

로마교구는 구 로마제국 수도 로마에 위치한다. 현재 로마 가톨릭 교황청 세력의 본체가 칼케돈 회의 당시의 로마교구이다. 로마교구는 황제(콘스탄티누스)가 수도는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천도했어도 교회 본부, 곧 기독교 세계적 중심은 로마에 두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증거가 표면적인 부분에서 몇 군데 찾아볼 수 있다. ① 니케아 회의(AD 325년) 대의원으로 자파 교구 감독들을 많이 보내지 않음으로 회의의 격을 작게 평가 ② 니케아 신조 중 성령론 시비로 제 1차 니케아 회의의 존재감을 소홀히 하고 있다. ③ 제 1차 니케아 회의의 보완 성격도 가진 제4차 칼케돈 회의에서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로마교구 휘하에 두고 싶었던 음모(?)의 좌절.

칼케돈 회의 이후 로마교구는 ① 계속해서 '성령론' 시비로 말미암은 '삼위일체론' 해석 차질로 기독교 이론(교리)적 기틀을 무력하게 했다. ② 이는 삼위일체와 기독론 문의를 해온 이슬람 창설자 무함마드에게 확신을 심지 못한 결과까지도 무관타 할 수 없을 것이다. ③ 성령론 시비는 화상시비를 불러서 동서 로마교회의 갈등을 더욱 심화하였다. ④ 드디어, 로마 교황권은 이날을 기다렸을지 모르나 AD 1054년 성탄절에 동서로마교회는 영원한 결별을 하게 된다. ⑤ AD 1453년 5월 21일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게 패망한다.

드디어 로마제국과 제국의 기독교 기반이 함께 무너졌다.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게 결정적 위협을 받을 때, 당시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1세는 교황을 찾아가서 교황식 세례를 받으며,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교황권에게 바치겠다고 무릎 꿇고 호소했다.

제4차 칼케돈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의 기독론을 확정적으로 정죄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로마교구 하부조직으로 두고 싶었던 그 마음을 431년(제3차 에베소 회의)과 1천년쯤 되는 해에 동로마제국의 본체인 콘스탄티노플이 로마 교황청 품이 아닌 이슬람의 맹주인 오스만 투르크의 품으로 들어갔음을 확인하라. 그리고 그때 콘스탄티노플 기독교 모두는 '교황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바치느니 차라리 이슬람 터반 앞에 바친다'고 하였던 비명 같은 슬픈 노래를 기억해야 한다.


2. 동로마 교구 탄생


동로마 교구는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구, 로마 교구, 수리아 안디옥 교구,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구, 맨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교구가 황궁의 천도를 말미암아 생기면서 로마 교구의 심기를 흔들었다. 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은 서로마 동로마의 갈등인양 계속해서 갈등과 견제 속에서 세계 기독교의 포부, 형식, 현재, 미래에 대한 운명적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AD 1054년 전후 영국을 제외한 동로마 지역과 슬라브 민족을 향한 선교과정에서 지나친 경쟁을 하는 등 '기독교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큰 피해를 안겨주었다.

3. 단성론 기독교 세력들


1, 2, 3, 4차까지 집중적으로 노력했던 세계 기독교는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합의해 내지 못함으로 크게는 양성론과 단성론으로 세력이 분리된다. 이집트, 수리아, 앗수리아, 페르시아 등이 '예수는 누구냐'에 대한 이해 차이로 이후(AD 451년) 150년 쯤 뒤에 아라비아에서 단성론적인 발상, 그리고 기독교가 버린 것들을 모아서 영원히 기독교와 대립하고 자웅을 겨뤄야 할 새 종교를 만들었으니 그게 이슬람이다. 이슬람은 예수 그리스도 이전과 이후 이스라엘과 기독교 역사의 심장에 꽂힌 화실이 되었다.

4. 동방 또는 아시아 기독교의 탄생


동방 또는 아시아 기독교는 정확하게 말하면 소아시아 일곱교회까지 포함해야 하는데 지구의 터 위에서 공평해야 할 아시아 지분이 기독교에서는 한동안 없어졌다. 예수께서 오신 예루살렘과 온 이스라엘이 아시아이며 터키, 페르시아, 주앙아시아, 동남아시아, 대륙아시아 모두가 아시아요 또 다른 이름으로는 '동방'인데 이 이름을 기독교 무대에서는 상실한 채 세월을 허송했다.

본 연재물인 '유라시아 기독교 역사'에서는 유럽과 아시아로 크게 나누고, AD 451년 칼케돈 회의가 폐막되는 시간부터 네스토리우스를 중흥조로 하여 아시아 기독교 지분을 챙겨보겠다. 왜냐하면 네스토리우스가 로마 제국 기독교로부터 버림받음으로 그의 갈 길은 아시아 뿐이었다. 네스토리우스가 이단 정죄를 받을 때(AD 431년), 그리고 추방되어 사막을 떠돌 때 그의 제자들은 에뎃사(터키의 산르 우르파)에 집결해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가 로마교구의 주목을 받고 있을 때, 네스토리우스만 제거하면 그 여세를 몰아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한등급 낮추어 로마교구 산하에 두고 싶어서 그들이 가슴 태우고 있을 때, 로마의 기독교를 사랑하고 있는 많은 동방지역의 교회들(시리아 서부와 동부 감독들)이 우려하고 있었던 바로 그 사태가 현실로 다가왔다.

네스토리우스가 죽자(AD 451년) 그의 제자들은 에뎃사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들은 페르시아에 뿌리를 둔 기독교 공동체의 환영을 받으면서 합류한 것이다. AD 435년 이후 에뎃사의 감독 이바스(Ibas of Edessa)가 이 학교의 교장이었다.

AD 457년 이바스 감독이 죽고 칼케돈 신조의 지지자가 감독을 맡자 이바스 감독의 뒤를 이어 에뎃사 신학교를 맡은 나르세스(Narses)는 학교를 페르시아의 니스비스로 옮겨 본격적으로 네스토리우스파가 주도하는 아시아 시대를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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