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푸(Bapu=father) 함석헌의 삶]


       1970년대 민주화운동 시절 김대중·이휘호 여사 등과 함께.


옥중에서의 필기도구, 중요한 주제 담는 진귀한 그릇
스파이 노릇하라는 요구 죽어도 못할 일… 월남행


소련 군정하의 첫 감옥살이


이제 이후 함석헌이 더 이상 북에 머문다는 것은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온몸을 그야말로 난타(亂打) 당하고 신의주 내무서를 '기어나오는' 신고(身苦)를 견디어낸 함석헌이 이제는 하늘같은 어머니, '상놈들의 땅'을 버린채 빠져나가야 한다.

50일 감옥살이를 시키고 내보내면서 내무서장은 아주 은밀히 함석헌에게 해방된 조국에의 충성을 강조하면서 한 기이한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함 선생, 윗 사람들은 함 선생을 극렬한 반동자라면서 처치해 버리라 하는걸 내가 함 선생의 항일자세를 누누이 역설해서 보아주기로 했소이다. 이제 나가시거든 몸 관리 잘하시고, 우리 인민위원회에 깊은 협조를 바랍니다.”

함석헌은 이 다섯번째의 감옥행을 '죽어서 나올 것으로' 아예 맘을 놓아버렸던 터였었는데, 바로 이 즈음이 김일성의 절세의 애국자, 독립운동의 지도자 운운하며 등장하는 때여서 인심의 반동을 잠재워야 하는 때.
함석헌이 마지막 길로 여기며 끌려갔던 길이 고난의 50일 철창살이 후 다시 되돌아온 것은 이같은 역사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함석헌은 이 신의주 내무서의 50일 수감살이 중 두 여인의 지극한 시중을 받았다. 처음 한주간은 가족까지도 일체 면회가 불가능했었지만 신의주 사회에서는 지식층의 여성들로 구성된 '우리 여성회'의 회원들 중 힘이 있는 이들이 있어 내무서의 소련군 책임자와의 사이에 협의가 이루어져 함석헌과의 면회가 거의 자유롭게 되었는데, 이때 함석헌이 출소할때까지 시종일관 용품이며 식품, 때때로의 필수품들을 제공한 두 여성이 있었다. 계명성과 김일선.

계명선은 함석헌의 고향 용암포 출신으로 동경여자 고등사범을 나와 신의주 명문인 동문여중의 교사로 십수년 동안 근무중이었고, 게다가 함석헌과 동갑내기로 아주 사사로운 이야기까지를 나누는 막연한 관계였다.

김일선은 계명선의 동문여중의 제자로 스승 계명성과 함께 동문여중의 교사로 재임중이었다. 옥중의 함석헌에게 더욱 지극했던 여성이 김일선이었다.

김일선의 함석헌 시중은 거의 '헌신'에 가까웠다. 김일선이 함석헌에게 바치는 정성은 한 스승에게 드리는 존경을 넘어 분명히 이성(異性)적인 지경과 종교적인 지경을 끊임없이 넘나드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김일선은 홀로 있을때면 눈을 감고 함석헌을 그리며, '선생님은 나의 하늘이십니다'했고, 그는 함석헌의 1947년 2월 26일 월남길을 조금후에 뒤따르게 되는데, 그것은 오직 한 맘, 함석헌에게 이끌려서였다.

김일선은 조심스럽게 소련 군인 간수의 눈을 속여 연필과 조각종이 몇장씩을 넣어주곤 했다. 함석헌이 필요하다며 요구해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옥중의 선생님께 필요한 것이 연필과 종이일 것이라는 김일선 스스로의 믿음 때문이었다.

필기도구를 몰래 받아들면서 신기하리만큼 함석헌의 가슴에 새 기운이 일기 시작했다. 김일선의 고마움 그지 없었다. 그것은 함석헌에게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니었다. 어머니, 삶(生), 뜻, 우주, 역사, 종교, 나, 너, 스스로함, 과학, 문화, 생명…. 한없이 이어지는 주제들을 고스란히 담아낼 수 있는 진귀한 그릇이었다.

계명성은 더러 면회에 빠질 때가 있었지만 김일선은 함석헌이 출감하기까지 옥중 50일간 어느 한주도 빠질수가 없었다. 연필과 종이를 김일선에게서 받아들면서부터 함석헌은 옥중에서 얻은 생각들, 득음(得音)들을 시 형식으로 써서, 역시 김일선의 손에 전해 내보냈는데 이 시 모음이 후에 〈쉰날〉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다.

함석헌이 출감하면서 받게된 못잊을 선물이었다. 아직도 걷기에는 몹시 불편한 몸을 계명성과 김일선에게 의지해 그들이 함석헌의 출감을 미리 통보받고 정성들여 준비해놓은 한 처소로 안내되었다. 처소에는 깨끗한 이부자리가 준비되어 있고, 머리맡엔 조그마한 탁자가 놓여 있는데 그 탁자 위엔 하얀 종이로 표지가 되어 있는 노트 한권이 놓여 있었다. 함석헌의 시선이 그 노트 위에 꽂혔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 표지를 들춰보았다.

아…. 그것은 함석헌이 50일 동안 감옥에서 김일선의 손에 내보낸 시의 묶음이었다. 함석헌도 이제서야 그렇게 써보낸 것이 300수나 되었음을 알게 된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렇게해서 함석헌은 꼭 일주일동안 계명성과 김일선의 지극한 간호로 얼갔던 몸을 회복하고 용암포의 본가로 돌아오게 된다.

아내 황득순은 말없이 옥살이에서 돌아온 남편을 맞았다. 그때만이 아니었다. 황득순은 그 이후 일생을 말없는 여인으로 오로지 함석헌을 위해 드리고 갔다. 그녀는 도대체 함석헌에 대해서만은 옳다, 그르다 함이 없었다. 함석헌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거나, 어떻게 대하거나간에….

함석헌이 출감하여 일주일 동안이나 다른 여인들이 준비한 침소에서 간호와 시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리고 돌와왔을 때 황득순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생각이었을까? 물론 마을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잡음(?)들이 없을 수 없었지만….

함석헌은 소련군정 치하에서 1946년 12월 24일 다시 투옥을 당하게 되는데, 첫 투옥 출소 후 1946년 1월 23일 이후 12월 24일까지의 삶은 거의 '죽어서 사는 삶'이었다.

할수 있다면 어머니를 모시고 그저 힘써 농사나 하고 싶은데 감시하는 눈초리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고, 사나흘이 멀다하고 보안서 출두령이 내려지고 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그런데다 함석헌에게 예전에 없던 일이 생겼다.


그저 울음이 복받치는 한 해 1946년


'아는 사람을 만나기만 하는 그저 울음이 복받히는' 것이었다. 울고, 또 울고. 가족들이야 함석헌을 믿는 믿음 흔들리지 않았지만 주변의 시선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함 선생이 아무래도 좀 이상해진 것 같아' 했다. 그러나 사실은 함석헌에게 있어 이 1946년 울며 산  한 해는 그를 세계적인 종교 사상가로 떠올리기 위해 특별히 준비된 한 해였다 해야 옳을 것이었다. 울음으로 산 한 해였다는 데서 말이다.

그렇게 울어사는 함석헌에게 12월 24일, 이번에는 보안대원들이 직접 찾아와 또 보안서 동행을 요구했다. 맏딸 은수의 집에서였다. 은수가 첫 아기를 낳았는데 딸의 집에 사람이 없던터라 함석헌이 손수 그 해산 시중을 들고있는 중이었다.

그는 끄는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었다. 끌려가 한달을 복역하고 풀려났다. 그러나 풀려난 것이 거저가 아니었다. 출감하게 되는 함석헌을 특별히 내무서장실로 부른 서장은 아주 은근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함 선생, 연초에도 말한 바 있습니다만 사실은 상부에선 함 선생을 처음부터 반동분자로 낙인, 처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소. 그런걸 내가 함 선생의 항일 투쟁을 열렬히 주장해서 석방시키기로 했었소이다. 아무쪼록 몸 건강하셔서 인민정부 수립에 큰 수고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인 서장은 “그런데 함 선생, 함 선생이 해야 할 일이 한가지 있소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주에 한번씩은 내무서에 나오셔서 그 결과를 꼭 꼭 보고해 주셔야겠소이다.” 하는 것이었다.

내무서장이 말한 그 결과란 이유필(李裕弼)의 후임으로 평북 자치위원장이 된 백영엽의 거동을 내밀히 살펴보는 것으로 그래서 한주에 한번씩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천하의 함석헌도 석방해 주면서 요구하는 내무서장의 그 요구에 '아니요'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 백영엽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조건으로 석방된 함석헌은 차라리 죽을지언정 그럴수는 없었다. 아, 이 노릇을 어찌해야 좋을고….

두 주가 지났다. 지난주엔 내밀히 살폈지만 별일이 없었다는 보고로 무사히 돌아왔는데 이번주는 달랐다.

“다른 선을 통해서도 정보를 수집하고 있다”면서 “사실은 함 선생이 보안협조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 우리는 다 알고 있다. 다음주에는 확실한 보고를 해주기 바란디. 다음주에도 그런 식이면 우리도 별도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

결국 함석헌에게 스파이 노릇을 하라는 것인데 함석헌의 말대로 그것은 죽어도 못할 일이었다.


1947년 2월 26일, '에라, 아주 쉴곳으로 가자'

이제 함석헌의 길은 동서남북이 다 막혀버린 터, 함석헌은 후에 그가 쓴 그의 자서전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에서 월남할 결심을 하는데, 그때의 심정을 '에라, 아주 쉴 곳으로 가자'(전집4, p.297)했다고 썼다.

역시 알 수 없는 말이다. 함석헌이 남한만은 '아주 쉴 곳'으로 믿은 것이었을까? 어쨌던 이전에도 남한행을 생각해 본적이 없지 않았지만 그럴때마다 그럴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곤 했던 것은 그의 어머니 때문이었다. 그에게 어머니는 또 하나의 하늘이었으니….

그런데 바로 이때 박천에서 박승방(朴?旁)이 함석헌을 찾아왔다. 그는 '나는 함석헌 선생님을 통해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는 오산학교 출신의 사랑하는 제자였다.

200리 길을 걸어왔다는 제자 박승방은 아주 결연한 어조로 함석헌의 월남을 강청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지금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후에 저희들이 반드시 또 모시고 갈터이니 조금도 걱정마시고 출발하자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어머님의 태도였다.

“아비야, 하늘이 아비를 도우신게야. 내 걱정 말고 어서 가.”

그래서 함석헌은 신구약 성경책 한권만 달랑 들고 사랑하는 제자 박승방을 따라 나섰다.

1947년 2월 26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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